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하나의 과업, 자녀됨
자녀됨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멍에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며, 눈치채더라도 애써 외면한다. 이 세상에 하나의 의무가 더 존재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불편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자녀됨이라는 짐을 인정한다면, 내리사랑은 완전하고 거룩하다는 신화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이 많은 부모를 추앙하고 그들이 주는 물질적, 정신적 양식을 먹고 크는 아이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 좋은 사랑을 받는다면 건강하게 자란다는, 아니 자라야 한다는 것은 오래된 법칙이다.
자녀됨의 의무는 바로 부모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 부모의 양육은 항상 옳으니 그 지고의 희생을 자신들의 행복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 성스러운 그림에 다른 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자녀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생사 필연인 고통, 상처, 두려움, 슬픔을 숨겨야 한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정상성을 연기한다. 그렇게 또 하루가 안전하게 지나간다.
이는 매우 어려운 과업이지만 난이도에 비해서 별일로 여기지 않는다. 자녀가 무탈히 살고 있음의 공은 잘 키운 부모에게 있기 때문에 이는 편안함과 더불어 자부심까지 안겨줄 수 있는 궁극의 효도이다. 어떤 아이는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실제와는 많이 다른 괜찮은 척을 할 것이고, 어쩌면 이것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분들을 위해서 스스로 별볼일 없다 여기는 자녀들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일 수도 있다.
종종 자녀됨을 해내는데 실패할 뻔하는 아이들이 존재한다. 특히 정신적 아픔은 문제 중에서도 으뜸이다. 대인관계 불편감과 진로의 어긋남, 갑자기 엄습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이유없는 우울감은 이 과업의 위기상황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은 부모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개입받기를 주저한다. 아픈 아이들은 자존감도 낮다. 그들은 현실에서 전혀 효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인식하며, 더더욱 유일하게 가능한 정상성 연기에 집착한다.
이렇게 심리치료를 거부하고 병을 키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비틀어진 모습의 희생이다. 그러니까 부모를 위해서 하는 건 맞다. 결과적으로 시간은 이 고통을 더 키울 것이니 그들이 이 아픔도 감수할 정도로 아주 많이 사랑했음을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엔딩은 해피하지 않을 것이며, 지켜보는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것이다. 읽고 쓰고 움직이고 어울릴 힘을 모두 소진하여 완전히 멈출 때에야 그동안 부모를 위해 정상성을 연기했다가 미뤄두었던 짐을 처리하게 될 것이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는 책망일 것이고 자녀됨의 과업은 실패가 된다.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이가 노력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드라마의 결말은 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