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언어폭력에 관하여
'하지만 그건 팩트인걸요.' 이 말이 나오는 순간 우리 대화의 승부는 결정된다. 그 소통의 목적이 논쟁이 아니었어도 상관이 없다. 메시지가 사실의 지위를 얻는 순간 그것은 다른 차원의 신성한 지위를 얻게 된다. '팩트 폭격'이란 단어는 '팩트'라는 단어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어휘가 그려주는 그림에서 팩트를 말하는 사람은 폭격기를 타고 하늘에 있으며, 본인은 반격당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상대를 때릴 수 있다. 팩트폭격은 해명하지 않아도 당연한 권리처럼 느껴진다.
어떤 말을 우리가 팩트로 포장해야 할 때는 정해져 있다. 바로 타인을 비판하고 싶을 때다. 보통 비판은 무례한 일이므로 터부시되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언제부턴가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는 진부해졌다. '그게 팩트니까'는 여전히 세련되게 보인다. '너를 위해서'는 온정적으로 보이지만 '팩트니까'는 냉철하다. 누군가를 도울 의도라는 건 의심스럽지만 진리를 전달한다는 목적은 어찌할 수 없다. 사실의 교환이라는 명분은 남을 쏠 수 있는 자유를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이다.
담론의 장에서 누군가에게 팩트폭격을 했다는 평가하는 그 자체로 찬사이다. 발사할 수 있는 팩트가 많다는 것은 화자의 해박한 지식을 의미한다. 타인의 가슴속 깊이 박힐 팩트을 골랐다는 것은 깊은 지성을 함축한다. 재미있게도 이 팩트는 말하는 사람에게 유리한 것임에도 그는 용기를 가진듯, 그러니까 짐짓 쓴 진실을 직면하는 저항을 극복한 듯 행동한다.
이때, 말하는 태도를 문제삼으면 찌질해지므로 오직 팩트로 반격하는 것 만이 허용된다.
너와 나의 경계가, 집단과 집단의 문화차이가, 개인과 우리의 침해받지 않아도 될 사적 공간은 팩트폭격으로 인해 허망하게 무너진다. '사람들이 날씬한걸 좋아한다는 것이 팩트잖아'라는 말에 '나의 몸은 타인의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는 가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돈이 많으면 주변인들한테 인정받는다는게 팩트잖아'라는 주장을 하는 이는 배금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손쉽게 현실을 외면하는 몽상가로 취급한다. 분명 폭력임에도 팩트로 포장된 메시지에는 그런 거친 뉘앙스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팩트'를 강조하는 태도는 일관성이 없다는 점에서 교활하다. 그들은 분명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기술을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여자들은 모이면 남의 뒷말을 한다는 것이 팩트'라고 말하는 사람은 성차별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지는 정치 연설이다. 하지만 뒤에 '팩트'라는 단어를 붙이며 그는 자신에 논문 발표자의 지위를 부여한다. 나서서 군중을 설득하고 의견의 흐름을 형성하면서, 기자나 과학자 정도의 책임만 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뻔한 속임수가 먹히는 이유가 뭘까? 왜 이 사회는 '팩트'를 이렇게 섬기는 것일까. 왜 그게 사실처럼 보이기만 하면 모든 권위를 내 주는 것일까? 우리의 무의식 속에 아직도 세상에는 사실을 규칙에 맞게 조립하기만 하면 모두가 획일적으로 따라야 하는 '절대의견'같은 걸 찾을 수 있다고 믿는게 아닐까. 아니면 아직 사실은 결국 진실의 부분이라는 걸 잊고 살고 있어서 사실을 파편적으로 드러내는 것 자체가 언론 왜곡이라는 걸 감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제 이야기가 오가는 현장에서 누군가 자신의 의견이 팩트임을 내세워 격에 맞지 않는 지위를 요구할 때, 당당하게 맞설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메시지의 사실 여부 이전에 듣는 이를 존중하는 태도인지가 먼저 평가 되어야 한다고, 더 이상 '팩트'의 횡포에 무릎 꿇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