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약 한 달을 입원하고
퇴원한 후 산후 조리원에 입소했다.
산후 조리원은 아이가 생기고
약 2~3달 후 서울대병원 근처로 예약했다.
역시 세상은 넓고
돈 나갈 곳은 많다.
산후 조리원에 입소하고
처음 며칠은 굉장히 천국 같았다.
따뜻한 온도, 푹신한 베개, 맛있는 밥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동안 오랜 기간을 쉬었기 때문에
많은 업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난 출근했다.
열심히 밀린 업무를 해치우고
퇴근하면 조리원으로 향했다.
(그 당시에는 코로나가 심하지 않을 때라
남편까진 조리원 상주가 가능했다.)
조리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밥이 정말 맛있었다.
아내는 한 달을 입원해서 인지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는 게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처음엔 조금 낯을 가려
밥 먹을 때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상황의 산모들과 함께 있으며
수다쟁이가 되지 않을 순 없었다.
아내는 매일 3끼를 다른 산모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 때문에
수다 떨면서 식사가 가능했다.
나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떨 수 있던 수다는 모두 떨어 논지라
나와의 수다는 노잼인 시점에서
같은 병원에서
같은 시기에 아이를 낳고
같은 고통을 느껴본 누군가와
대화하는 건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아내가 밥이 너무 맛있다며
나에게도 먹어보라고 권했다.
조리원 비에 남편의 밥 값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남편이 식사를 하기 위해선
한 끼당 9000원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9000원에 한 끼는
너무다 부담스러웠다.
당시에는
9000원이면 국밥 두 그릇 먹을 수 있었다.
하루는 나가기 너무 귀찮고
하도 맛있다길래
배도 고프고 궁금하기도 해서
한번 먹어봤다.
나는 조리원에 있는 2주 동안
조리원에서 오로지 2번 식사를 했다.
그 이유는 물론 내가 출근을 하고
늦게 온 적이 많은 것도 있지만
그곳에서 밥을 먹는 남편이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난 의외로 ‘샤이보이’ 다.
많은 산모들 사이에서
밥을 먹기 조금 부담스러웠고
나와 함께 있는 아내도
전처럼 수다를 떨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 다음번엔
사람들이 다 먹었을 때,
식사시간 끝나기 조금 전에 가 혼자 밥을 먹었다.
조금 찌질이 같았지만
그게 그나마 편했다.
근데 밥은 진짜 맛있었다.
반찬을 계속 리필하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 이마저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부턴 나가서
국밥을 사 먹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두 번째는
내 인생에서 아주 수치스러운 경험을 한 것이다.
조리원 화장실은
문이 잠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고가 났을 때
빠르게 대처하기 위함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화장실에 있을 때였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려고 나체로
양치를 하고 있었다.
설마...
그렇다
갑자기 화장실 문이 열렸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해 보자.
산후 조리원에 남편이 씻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었다.
누가 열었을까?
와이프..?
그렇다.
난 당연히 와이프인 줄 알고
거울을 보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체로
양치를 계속했다.
그런데 잠깐..
왜 문이 계속 열려있지?
이상하게 문이 닫히지 않았다.
왜 안 들어오지…?
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
아내가 아니었다.
청소를 하려고 들어온 직원분이었다.
이런 상황이 온다면
소리를 지를 거 같지만
난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은 닫히지 않았고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 같은 3초가 지나고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문을 좀 다….”
그때서야
직원분이 “아이고 죄손 합니다”
하며 문을 닫았다.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대충 씻고 출근했다.
그 이후로 조리원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차마 방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솔직히 조리원에 안 가고 싶었다.
그 직원분은 사과했지만
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고
그분이 청소를 하러 들어오면
이불을 덮고 자는 척했다ㅋㅋㅋ
만약 그분이 이 영상을 본다면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다.
그리고 하나 또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저.. 그날 좀 추웠어요... “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건
아내가 매우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조리원에 있는 동안
아이들은 모두 인큐베이터에 있었다.
산후 조리원에서
아이 목욕하는 법, 마사지하는 법,
밥 먹이는 법 등 아이를 케어하는 방법들을
배우는 시간이 있다.
이 시간마다 아내는 방에 누워만 있었다.
다른 산모들의 아기들을 보고
다른 산모들이 아기를 돌보고
이것저것 배우는 모습들을 보며
엄마로서 미안함과
공허함을 느낀 것 같다.
우린 하루에 두 번 아이들 면회를 다녀왔다.
면회를 가서
캥거루 케어도 하고
아이들 밥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 줬지만
그 이상을 해줄 순 없었다.
그리고 내가 출근을 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내는 큰 외로움을 느꼈다.
대학병원에서는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이가
퇴원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이 충족되면
바로 퇴원을 해야 한다.
(아이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오기 때문에..)
정말 다행히
우리가 조리원 퇴소 3일을 남기고
두 아이가 퇴원했다.
그날 처음으로
조리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던 아내는
나에게 울면서 얘기했다.
‘지금 너무 행복해…’
역시 엄마는 달랐다.
아이들을 바라만 봐도 너무 행복하다는 말이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내심
‘아 … 이제 육아 진짜 시작인데..
좋은 날 다 갔다..’
라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조리원에 더 있으라고 권유했지만
이미 자리가 다 차 있어 연장은 힘들었다.
다른 조리원에 갈까 고민도 했다.
퇴소 하루를 앞두고 다른 한 친구도 퇴원했다.
그렇게 3명의 아이와 하루를 보냈다.
아내 몸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너무 답답하다며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는 게 좋다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린 아이 셋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약 2주 후 다른 아이가 퇴원하게 되고
네쌍둥이 완전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