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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셔레이드 걸
Jul 06. 2024
은행원 삼촌
그리고 일본 고모
내 막내삼촌은
상업고등학교
를 졸업했는데 공부를 제법
잘했던지
학교
추천으로 은행에
입사했다고
한다.
그
무렵 태어난
삼촌의 둘째 형의 맏딸인
나는 조카 중 첫 여자애라는 타이틀 덕분에 운 좋게도 삼촌의 급여
지출
비목 1순위가 되었다.
금호동 달동네 단칸방에서 살았던 시절에 찍힌
내
사진에서
고급지고 세련된
옷을 입고 있다면
그
것은
높은 확률로 막내삼촌과
일본에서
보내온
고모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좋은 날들은 길지 않았다.
동료의 차를 타고
회식장소에
가던 삼촌은
접촉
사고를 당했는데 하필 조수석에 앉는 바람에
동승자들 중
제일 심하게 다쳤고 특히 머리부상이 심해
응급
뇌수술을
한 뒤
영구장애를 갖게 되었다.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했지만
5남매 중 유일한 화이트칼라 직장인인 그가 집안을 일으켜 세우리란 기대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친할머니가 살아계신 동안 막내삼촌은 마치 어린 아기가 된 것 같았다.
할머니는 정해진 일과에 맞춰 삼촌을 먹이고 씻기고 재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 루틴은 고모의 일상이 되었다.
이제
팔순은 훌쩍 넘긴 고모는
여전히
시집도 가지 않고 오로지 성당과 삼촌
돌봄에만 매달리고 있다.
경제사정이 지금이야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고모는
80년대에
63빌딩
인근의
아파트를
한
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여유 있던 미혼여성이었다.
그 집을 떠올리면 채광이 좋고 그 어느 곳에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풍금과 욕조가 있고 새가 지저귀는 벽시계가
걸려있으며
거실장에는
예쁜 도자기 인형이 하얀 레이스 위에 놓인
그야말로
꿈의
집이었다.
엄마는 고모의 일본 체류기간이 길어질 때마다 나와 동생을 데리고 장안동
집
에서 여의도까지 버스를 타고
고모의 아파트로 향했
다.
커튼을 걷고 창을 열고 환기를 시킨 뒤 욕조에 더운물을 받아 우리를 담가놓고 엄마는 집안 청소를 하곤 했다.
집을 나설 때면 검정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모아 복도에 있는 쓰레기 배출구(일종의 자체 크린넷)에 던져 넣었는데 나는 그 최첨단 시스템에 매료되어 오싹함을 꾹 참고 매번 그 구멍을 들여다보곤 했다.
70년대부터
일본을 자주 들락거렸던
고모가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
서민
들은 평생 비행기 한번 탈일 없던 시절이다)
미용일을 한다, 밤무대 가수다, 무속인(신엄마 비슷한 존재가 있었다)이다-
소문만 무성했는데 어른들이 쉬쉬하는 걸 보면
남들 앞에
자랑스럽게 드러낼 일은 아니었겠거니 추측만 할 뿐이다.
아무튼 젊은 고모에게는 직업이 있고 친구가 있고 꿈이
있었겠지.
그래서인지 한동안
삼촌은
형제들의 집을
떠돌며 맡겨졌는데
88 올림픽이 한창이던
초등생 시절
,
우리 집에도 잠시 머물게 되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오면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가출한 삼촌을 찾아 온 동네를 수색하는 게
나의
방과 후
일상이었
다.
덕분에 동네 파출소에서도 삼촌은 네임드였다.
뇌수술 후유증으로 반신이 마비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왜 매일 집을 나가는지
,
왜 우리 엄마를 이렇게 괴롭히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저 밉고 원망스러웠다.
퇴근 후 매일 선물을 사 오는 은행원 삼촌이 갖고 싶었다.
얼마 뒤
아버지와 고모가 크게 다툰 뒤
삼촌은
큰아버지의
집으로 떠났다.
나는 어렴풋이 죄책감을 느꼈지만 우리 집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지난여름에
이어
삼촌은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
너무 늙어버린 조카를 알아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무 늦기 전에
뵈어야
할 텐데
생각한다.
한 번은 꼭 직접 말하고 싶다.
나를 귀여워해줘서 고마웠어요,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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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감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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