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 오빠에게> 중 '당신의 평화'
여성작가 7인이 써 내린 여성을 둘러싼 일곱 개의 삶, 소설 <현남 오빠에게>에는 모두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쇼코의 미소>로 유명한 최은영 작가의 단편 '당신의 평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읽는 내내 이건 소설이 아니고 그냥 네이○판 실화잖아... 라며 중얼거렸다.
호된 시집살이를 하며 남편에게는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나 대신 봉양할 가성비 좋은 몸종 정도로 취급받는 정순.
남편의 생일날, 장을 봐오다가 실신한 정순은 앰뷸런스에 실려갔다.
폐에 물이 찼다고 했다.
생일의 주인공은 집에서 케이크 위의 초를 불었는데 그럼 누가 보호자로 앰뷸런스에 동승했을까?
어린 딸은 어른들의 비정함에 충격을 받고 엄마를 위해 신문지 더미 위에 올라가 설거지를 하며 가사일을 돕는다.
그런 엄마를 현명하다고 칭찬하는 남자친구는 사사건건 넉넉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유진의 나이브함을 조롱한다.
심지어 스무 살 대학동아리를 통해 참여한 농활에서 마을 노총각에게 당한 성폭력조차 그녀의 부주의함으로 귀결된다.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예민하게 반응한 건 상대가 가난한 농민이어서, 너의 계급적 바운더리를 침해했기 때문이 아니냐 힐난한다.
결국 헤어지게 된 것도 자신이 가난한 남자이기 때문이라고 그녀를 탓한다.
간신히 부모에게서 독립해 살아가는 유진이지만 K장녀라는 꼬리표는 지긋지긋하게도 떨어지질 않았다.
애증.
엄마와의 관계는 그 단어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서로에게 모진 말을 내뱉고 상처 주고 상처받는 일들이 대면 루틴처럼 무한반복된다.
그러나 풍파 가득한 세월을 살아낸 탓인지 최후의 보루 같은 방어기제인지 엄마의 회복탄력성은 그야말로 울버린급이다.
하지만 어떤 기억들은 결코 지워버릴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좋은 것이든, 몹쓸 것이든 말이다.
※ 본문 중 발췌
유진은 정순에게 말하고 싶었다.
자신에게도 삶이 있다고.
자기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고.
어째서 엄마는 그렇게 일방적일 수 있느냐고.
"넌 내 유일한 친구야."
정순은 유진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딸이 있어 참 다행이야."
"엄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그런 얘길 하고도 아무렇지가 않아.
내 마음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엄만 항상 그랬어."
"넌 나로 살아본 적이 없어."
정순이 겨우 들릴 만한 소리로 말했다.
유진은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알고 있었다.
정순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을 것이고, 자신과 유진이 주고받았던 말을 지울 것이다.
그러나 유진은 정순이 오늘 했던 행동과 말들을 잊지 못하게 된다.
용서해도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언제까지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겠지만 오늘 같은 순간들이 만들어낸 거리를 좁힐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