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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여행자 Jul 24. 2021

살아남아야 하니까 사랑했을까

나는 왜 엄마를 떠났나. 11


 의붓오빠 이혼 후 우리 가족이 외출을 했을 때 새언니가 왔었다고 한다. 마침 우리 집과 5분 거리에 살던 외할아버 께서 공장에 들르셨다가 화물차에 신혼집 물건들을 싣고 있던 새언니와 맞닥뜨렸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할아버지와 새언니가 실랑이를 했고

언니가 할아버지를 밀쳤다고 했지만 그건 외할아버지의

주장이었으니 사실 여부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혼은 그 당시까지도 여자가 손해 보는 장사로 인식이 퍼

 있었고 '이혼하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색안 을 쓰고 봤지만  이혼에 대한 시선은 꽤 달라졌다.




 의붓오빠의 이혼 이후의 삶은 '의붓오빠의 수난 시대'에

풀어낸 것처럼 고난의 연속이었다. 오빠도 한 번의 결혼 실

패를 거울 삼아 원하던 여자와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고 싶

었겠지만 몽골 여자에게 사기 결혼을 당할 뻔하고 베트남

언니와 결혼하게 되었다. 어쩌면 의붓오빠의 성향이 본인

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데 일조했는지도 모른다.

 오빠가 인생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아끼고 사랑했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들을 많이 했다고 생

각한다. 그런 면에서는 인간 대 인간으로 안타까웠다.


 새아빠는 의붓오빠에게 애정이 크지 않았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답게 아들인 의붓오빠에게 다정하지도, 따뜻

하지도 않았다. 오빠가 잘못하면 윽박지르고 주먹을 휘두

르셨다. 엄마 오빠를 부담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고작 열몇 살 터울의 오빠가 '엄마'라고 부를 때 가끔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때는 '한심하고 불쌍한 자식' 이라며 한숨을 쉬던 모습에서 오빠에 대한 동정심도

볼 수 있었다.


 엄마는 새아빠에 대한 사랑때문에, 재혼 가정을 어떻게든 지속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의붓오빠를 내치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증오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양가 감정 사이 에서 괴로워했다. 어떤 느낌인지 어느정도는 알 것 같아엄마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엄마의 삶은 아름답지 않았다. 아름답지 않더라도 희망

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언젠가 상상해봤다.

 아이가 딸린 나이 많은 남자라면 자식을 낳아 길러봤으
니 내 아이들을 책임지고 잘 길러줄 거라는 엄마의 예상 이 맞았다. 새아빠는 좋은 사람이었고 우리를 사랑해주
었다. 사춘기의 의붓오빠와 언니는 힘들고 혼란스러운
환경의 변화에도 사고 한번 치지 않고 성실한 학교 생활
을 했다. 엄마는 그런 의붓 남매에게 고마워했고 그들
도 새엄마인 우리 엄마를 따르며 좋아했다.
 새아빠는 무뚝뚝했지만 말없이 우리를 쓰다듬어주곤
했고 엄마와도 사이가 좋았다. 물론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아서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새아빠와 엄마는 합심하여 잘 헤쳐나갔다. 두 분의 온순하고 강인한 성품 덕 분에 집안은 대체로 평화를 유지했다. 우리는 재혼 가정이지만 누가 봐도 화목한 여섯 식구였다. 곧 태어날 막내까지 함께할 우리 일곱 식구의 가정에는 웃음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상상한 그대로면 좋았을까? 괜찮았을 것 같다. 하지

만 현실은 동화가 아니라 막장 드라마 요소가 넘쳐나는 현실

이니까 내 상상처럼 됐을 리 없다고 위로한다.




 현실은 고난을 먹고 행복을 키워낸다. 항상 즐겁기만 하면

오히려 행복을 모를 것이다. 희애락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인간이 겪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면 그건 그저

고통이다. 그럴때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의심스러워진다. 엄마와 새 가족들과 함께한 삶은 지옥과

비교하면 행복했겠지? 사실 난 진짜 지옥을 알려면 멀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나는 수많은 감정들과 마주했다. 다른

자식들처럼 나도 엄마를 본능적으로 사랑했다. 단지 나를

낳아주고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 난 그것이 생존과도 관 이 있다고 믿는다. 내게 세상의 전부인 엄마의 관심과 사랑 을 받지 못한다는 건 죽음과도 직결되니까.

 여태 있어왔던 자식 학대 살인사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진다면 그렇게 끔찍한 극 으로 끝이 나기도 한다. 바로 이곳이 지옥이었다.

 지옥에서 부모는 악마이고 자식은 형벌을 받는 망자같다.

나는 현실에서 형벌을 받고 있었다. 지옥에서 받을 벌을 조

금씩 나눠받기도 하나보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를 애증 하던 감정에서 '애'가 녹아 사

지고 있었다. 나쁜 감정 괴물이라도 있는 건지 엄마에 대

내 사랑을 끊임없이 갉아먹어치웠다.

 결혼해서 독립하고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엄마에 대한 애

정은 끊어지고 있었다. 손을 잡으려고 내밀면 자꾸 뿌리치

고 거듭된 실망을 안겨주는 엄마에게 나는 무엇을 기대했

을까, 왜 기대해야 했을까?


 나는 결혼하고 한 번의 유산 후 3년 만에 아이를 가졌다.

출산도 쉽지 않았다. 의사의 판단하에 제왕절개 출산 후 출혈이 심했고 몸이 많이 망가졌는데 지금도 후유증이 남 아서 이따금씩 관절염과 통증 나를 힘들게 한다. 지금에 와서야 몸조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처절하게 실감 한다.




 결혼 후 꽤 즐거운 신혼생활을 할 때는 '이제 사위도 보셨으

니 두분도 조금은 달라지시겠지, 엄마도 조심하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는지...   

 결혼했으니 출가외인이라며 남편들과 알아서 잘 살라더니 그런 당신들은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 우리를 끌어 들이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어나고 싶어도 가족이라는 이름으 로 얽히고 섥혀, 뿌리칠 수 없는 악의 고리같은 관계를 어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첫번째 임신 후 신혼 생활의 단꿈에 빠진 어느 날, 여동생 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꺼억거리며 울음 섞인 여동생의 목소리귓가를 때렸다. 또 한차례 폭풍이 몰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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