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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Mar 31. 2024

[소설] 고도를 기다리며

내가 나의 고도를 기다리는 방법은.

3월도 어느덧 끝을 향해 간다. 나에게 3월은 신학기가 시작되는 때이기에 언제나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밀도가 높은 시간이다. 그런데 올해는 무려 학교도 옮기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아이들과 동료들, 그리고 또 새로운 업무. 새로움이라는 단어의 설렘을 느낄 새도 없이 하루하루를 꼭꼭 눌러 담아 한 달을 채워 보냈다. 날마다의 시간을 얼마나 밀도 있게 보냈는지 저녁이 되면 스르르 잠이 들어 눈을 뜨면 아침이었다. 하루종일 바쁘게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보낸 낮시간도,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으면 시작되는 밤시간도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없었다.


이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 지칠 만도 한데 새로움이 주는 설렘이나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나의 생존 본능은 지침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잠들기 전까지 내일은 이걸 하고 이걸 하고 하며 할 일들을 떠올렸고 아침이 되면 출근하면 이것부터 해야지 하며 일과 일 사이에서 바둥대던 나였다. 이런 시간을 예상했던지 남편이 나에게 지난겨울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 예매를 해주었다. 노배우 두 명의 열연으로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는 20대 때 대체 무슨 말이냐며 읽으며 투덜댔던 그 희곡집이 아닌가. 끝까지 읽어도 기다렸던 고도가 나오지는 않기에 뭐 이런 내용이 다 있냐며 흘려버렸던 그때 그 책이었다.


3월의 마지막 주말, 그것도 무려 대구에서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ktx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다)하는 공연의 날짜가 다가올수록 사실 기다려지기보다는 부담스러워졌다. 할 일도 많았고 몸도 피곤하고 시간이 있다면 그저 침대에서 쉬고 싶은 나였다. 그래도 지치고 힘들었지만 지칠 기색을 보일 여유도 없었던 지난 한 달. 그 시간을 살아낸 나에게 심신이 더 지치기 전에 에너지를 더해줄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도 피어올랐다. 그래서 다시 이 소설을 꺼내 읽게 되었다.



에스트라공 (다시 단념하며) 안 되겠는데!
블라디미르 (두 다리를 벌리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서며) 그럴지도 모르지.     (걸음을 멈추고)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오랫동안 속으로 타일러왔지. '블라디미르, 정신 차려,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싸움을 다시 계속해 왔단 말이야.

 

 아니 뭐지. 책을 읽으며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에스트라공이 신발을 벗으며 안 되겠다고 포기하려고 하자 블라디미르가 그 말을 받아 대사를 내뱉는 첫 장면인데, 요즘 내가 나에게 많이 하는 말이 아닌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못하겠는데,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어 이런 생각들로 시도도 하지 않아서 놓쳐 버렸던 것이 내 인생에 얼마나 많았는가. '못하겠는데, 안 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도 한 발자국 더 내디뎠을 때만 보이는 것들을 요즘 보고 있다. 여전히 새로운 시도는 나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을 먼저 던지지만 두려움을 받아 안고 한 발자국 가보는 삶을 요즘 살아내고 있다.   


사실 새로운 학교에서 '생활지도부장'이라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전 학교에서 부장 경험도 거의 없을뿐더러 생활지도부장은 학교에서 누구라도 꺼리는 업무이다. 스트레스 강도가 높고 또한 일도 많아 다들 마지못해 하게 되고 또 어떻게든 피하려는 업무다. 그런 업무를 맡게 된 것은 내가 학교를 꼭 옮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업무라도, 학교를 옮길 수 있으면 해야 할 것 같아 덥석 잡아버리고, 지난 2월 내내 숱한 밤을 걱정으로 보냈다. 이제라도 못한다고 해야 할까. 이 결정을 취소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나를 가장 못 믿었던 사람은 나였던 것이다. 모두가 힘들다고 말한 업무는 힘든 이유가 있었다. 고된 업무 강도에 날마다 에너지를 소진하고 퇴근하지만 새로운 일을 통해 보이는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내가 덥석 잡고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보지 못했던 세계들. 학교에서 15년을 일했지만 흘려 보고 말았던 학교의 제규정을 꼼꼼히 공부하고 읽어보며 모든 학교의 시스템이 제규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것을 최근에야 몸소 느끼게 되었다. 새로운 일이 주는 압박도 컸지만 새로 알게 되는 것들로 나의 지평을 넓히는 경험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먼 일이지만, 다가올 스트레스를 스스로 처리하기 위해 힘들어도 주 3회 운동은 하려 노력했다. 바쁜 3월에 이렇게 운동을 규칙적으로 했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높은 업무 강도가 나를 지치게 하기 전에 방어하려는 나의 노력들이 쌓여가고 있던 날들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나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늙은 부랑자에게 마음을 주게 되었다.

소설 속에서 디디와 고고로 서로를 부르는 두 부랑자는 낮을 보내고 오후부터 하릴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어제도 그제도 기다렸지만 고도는 오지 않고, 지나던 소년이 고도가 내일은 올 거라고 말해준다. 그동안 그 두 부랑자는 내내 쓸데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고도를 기다린다.


에스트라공 : 가자
블라디미르 : 가선 안되지.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이제는 고도를 기다렸다는 사실도 이내 잊는 친구에게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둘은 고도를 기다린다. 연극이 끝날 때까지도 고도는 나타나지 않고 그렇게 끝이 나지만 아마도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하릴없이 그 고도를 기다릴 것만 같다. 그들은 결국 고도를 만나게 될까? 그 고도는 누구일까.

  그렇다면 나에게 그 고도는 누구일까. 꼭꼭 채워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고 난 밤에 내가 만나고 싶은 고도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루를 꽉 채워 더 나아가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그런 고도를 만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 두 부랑자는 왜 고도를 직접 찾아 나서지는 않는 걸까. 고도라는 인물은 어쩌면, 그 자리에서 하루를 잘 살아낸 이들만 만날 수 있는 걸까.



내가 기다리는 고도는 내가 있는 자리로 올 것이라는 믿음. 비록 오늘이 아니라도 내일은 꼭 올 거라는 생각이 그들을 끝까지 기다리게 한다. 그들 역시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알지 못할 것 같다. 그냥 그렇게 하루를 채워 보내고 서로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며 고도를 기다릴 뿐.  그렇다면 나도 내 고도를 만나는 방법이 분명 해지는 것 같다. 내가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생각하기보단, 이곳에 올 거라고 믿으며 나아가야 할 것 같다.  내가 하루를 꼭꼭 눌러 채워가면서 때로는 그것이 남들이 보기엔 쓸데없어 보이는 일 따위일지라도 그저 성실히 보내는 오늘이 고도를 기다리는 유일한 방법인 것만 같다.


블라디미르 : (안심시키듯이) 저녁때라오. 저녁때가 됐단 말이오. 이 친구가 자꾸 딴소리를 해서 나도 잠깐은 헷갈렸지. 하지만 난 오늘 이 긴 하루를 헛되게 보낸 건 아니오. 그래서 오늘의 일과도 이제 다 끝나간다는 걸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요.




 나도 나의 긴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고도를 기다려보겠다. 무리를 무릅쓰고 대구를 다녀온 보람이 있었다. 한 달을 꼭꼭 눌러 산 보람을 그래서 꼭 쓰고 싶었다.  

대구는 벚꽃이 피어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보게 된 환한 봄 꽃이 지난 한 달을 치하해주는 듯 했다.



<@ 표지사진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N회독하며 타고 내려간 기차에서의 내 자리. >

<인용 구절은 모두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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