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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Apr 14. 2024

나의 해방일지

함께라서 알게 된 해방의 의미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도 어렸다. 나는 27살에 첫째를 29살에 둘째를 낳아 20대에 두 아이를 낳는 인생의 숙제를 했다. 20대의 젊고 어린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늘 허둥대기 일쑤였다. 아이들에게 모든 걸 쏟으면서도 늘 부족한 것 같고 그 와중에 나라는 존재의 가치가 사라진 것 같아 이를 찾는 나의 양면성이 이기적으로 느껴져 버거웠던 시간이었다. 퇴근하고 나면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놀아주고 애들을 먹이며 아이들을 챙기느라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다. 일까지 하는 엄마라 부족한 것 투성인 내 모습이 벅차서 힘들기도 했다. 그런데 일터에 가면 내 친구들이나 같은 길을 가고 있던 동료들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는 느낌이었다.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나는 늘 쫓아가기 바쁜 그러나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는 부진아처럼 느껴지던 나날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근처에 있던 책을 들어 읽는 것뿐.

 

 두 아이가 자라 유치원생이 되자 한 시간씩 욕조에 들어가 놀기를 좋아했다. 고작해야 유치원생이었던 그들이었지만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듯했다. 하지만 물은 순식간에 안전사고를 만들어 오기에 욕실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못한 채 욕실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었다. 때로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채로, 때로는 불편한 펜슬 스커트를 입고 옷을 갈아입는 시간도 아까워 쪼그려 앉아 그저 뭐라도 읽었다. 애들은 문가에 앉아 있는 나를 틈틈이 바라보며 자기들끼리의 물놀이를 즐겼다. 고작해야 20-30분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의 까르르 소리와 첨벙첨벙하는 물소리는 나의 훌륭한 독서 배경음악이었다.

오늘도 나들이를 나와 모래놀이하는 막내를 두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책 읽기!




나는 그때 왜 그리도 읽어댔던가. 그때 읽었던 책들은 대체로 술술 넘어가는 소설들이나 에세이류였는데 대부분 여성 작가의 글들이었다. 그녀들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며 그네들도 나처럼 아이를 키우며 번민하는 시간이 있었겠지. 때로는 부족함에 때로는 존재의 아쉬움에 방황했겠지 하는 생각이 들며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한 작가들에게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그런 친밀감들은 부족하다 탓하는 나에게 따스한 다독임이 되어주었고, 모자란 것 같아 움츠러드는 나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응원의 손길이 되어주었다. 그래도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못하는 듯한 열등감은 자주 나를 주저앉혔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때로는 나보다 더 훌륭하고 잘 난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중학생인데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며 대견하게 생각되기도 하고 나도 두꺼워서 미뤄두기만 한 책을 성큼성큼 읽고 나에게 선생님은 이 작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그 물음을 던져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아이도 있었다. 선생이란 먼저 살아본 사람으로 최소한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이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한 내가 이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면 이내 내 안에 있던 열등한 마음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아이들 뿐일까.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어쩜 그리 훌륭한지. 그들이 저렇게 앞서 갈 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 같아 나의 지난 나날들이 초라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읽지 않은 책을 아는 듯이 얼버무리기도 하고, 때로는 예전에 읽어서 기억이 안 난다며 회피하기도 했었더랬다. 국어교사라고 세상의 모든 책을 읽는 것은 아닐 텐데 그때의 나는 왜 그리도 나의 부족함을 들키기 싫어했던가. 아이들에게도 동료 교사들 앞에서도 절대 부족하지 않은 척 거짓 옷을 입고 그런 체했다.


그런데 그런 체를 하려면 역시 또 책이 필요했다. 아이들과 그런 대화를 나누게 되면 이내 그 책을 주문해 읽게 되었다. 또 고전을 이야기하는 선생님들과 대화를 끝내고 나면 나도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렵다고 미뤄뒀던 카뮈의 소설들도 읽고 읽어도 읽어도 해석이 어려운 니체의 글들도 그나마 접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거짓의 시간들이 책을 통해 나를 떠밀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보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는 나의 부족함에 한탄하고 모자람에 아쉽다. 때로는 같은 책을 읽고도 번뜩이는 생각을 펼치는 사람들의 말을 듣거나,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전혀 다른 문장으로 표현해 내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역시 제자리걸음만 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달라진 점은 이제는 내가 예전처럼 그런 체를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의 나보다는 나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되려 묻고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왜냐면 그런 체를 하며 읽었던 책들이 내가 가진 부족함이 부족한 나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자라고 부족하며 저 멀리 잘 나가는 사람들조차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을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을 통해 나는 내가 느끼는 나에 대한 부족함의 보편성을 얻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보편적인 부족함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도 날마다 하지 않을 이유를 생각한다는 것.

끝내주는 독서 노트를 쓰는 사람도 실제로는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하기 위함이라는 것.

기획력이 뛰어나 모든 것을 잘 정리해 내는 사람도 실은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수많은 책의 작가와 인물들이 말해줬다. 그러니 부족함에 한탄하며 열등하다 느끼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나의 부족함에 한숨 내쉴 게 아미라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나아가 보라고. 때로는 제자리걸음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결국은 나를 밀어내 주어 더 멀리 나아가게 할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로소 나는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으로 나를 열등하다 느끼며 괴롭혔던 나에게서 그야말로 해방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해방감을 느끼다가도 일상의 작은 실수나 장애물에 이내 자신감이 꺾여 또 나를 한탄하겠지만, 그런 나의 한탄들이 모여 또 다른 힘을 내줄 거라고 믿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결국은 그렇게 내가 만들어 갈 거라는 믿음. 이런 믿음의 해방은 책이 나에게 주었다.



이 글은 나의 글쓰기 모임에서 썼던 글이다. 엄마와 교사라는 역할을 내려놓고 나 자신이 되어 글을 쓰는 우리는 그렇게 해방의 시간을 보냈다.
"그날 네 말로 인해 낡은 생각이 깨지고 나은 생각이 완성되는 찰나의 기쁨을 느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의 문제에 힌트를 얻은 거지. 콘크리트처럼 굳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이 스며드는 고운 흙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질색하는 일도 한번 시도해보고 안 읽히는 책도 읽고, 파도처럼 부단히 움직여야겠지."
(@해방의 밤. 은유)



계속 계속 읽어야겠다. 파도처럼 부단히 움직여 읽어나가야지. 그래서 고운 흙 같은 사람이 되어 느리더라도 천천히 차분히 나의 해방을 향해 계속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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