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달리는데 여유가 오지 않는 나날에 대한 고뇌
어느덧 5월의 마지막 주말이다. 나는 올해 만 40살이 되었다.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에서도 완전한 40대의 사람이 되었다. 40대라는 나이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중년이라 하면 인생의 가운데즈음을 지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려나. 그런데 가운데라는 단어는 어느 쪽에도 흔들리지 않고 균형을 잡고 있는 시기 같은 느낌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저기에도 혹하고 여기에도 혹한다. 그리고 가정도 일도 앞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문득 지난 나의 시절이 씁쓸해지기도 하고 다가올 날들이 원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못할까 쉬이 겁도 난다. 양안다 시인의 글을 읽다가 시인이 생각하는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불안이었다는 구절에 밑줄을 치며 공감을 했다.
중년으로 접어든 내가 느끼는 씁쓸함은 이런 것이다. 사회 초년생일 때 내가 바라보는 40대들은 어찌나 일도 잘하고 사회생활에 능수능란한 지 조금도 미혹됨이 없게 느껴졌다. 그들이라고 그렇기만 했겠냐마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초보의 눈에 비친 선배들의 모습은 훨훨 나는 새처럼 느껴졌달까. 그런 중년에 대한 환상을 지녔던 내가 사회 초년생인 교생 선생님과 요즘 수업을 함께 한다. 나의 수업을 보여주고 나의 수행평가 과정을 보여주며 아이들과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문득문득 부끄럽고 부족함을 들키는 것 같아 창피해진다. 내가 생각했던 중년의 교사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스쳐 씁쓸해진다.
집에서는 어떤가. 지난주는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요리를 하지 못했다. 아니 조금 기운을 내서 할 수도 있었으려나 그래서 못했다가 아니라 안 했다일 수도 있다. 아이들이 어지른 집을 그저 두었다. 빨래 바구니에 빨래가 차고 넘칠 때까지 못 본 체하고, 침대 위에 어지러운 이불들을 그대로 두었다. 하루가 다르게 엉망처럼 느껴지는 집과 주방을 내내 못마땅해하면서도 기운이 없다는 이유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손흥민의 아버지가 쓴 책에서 부모의 게으름을 아이들은 닮는다는 따가운 질책이 나를 향한 것처럼 느껴져 변명을 하려 하는데, 미루기만 하는 사람들은 실천할 생각을 안 하고 변명만 늘어놓는다는 구절에 그야말로 뼈를 맞고 주섬주섬 일어나 손에 잡히는 집안일이라도 하자며 나를 일으켰다. 신혼 때 요리와 살림에 잼병이었던 내가 사서 읽었던 훌륭한 주부들의 책은 40대쯤 되면 집안일 정도는 음식 정도는 뚝딱뚝딱해 낼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던가. 내가 생각했던 그네들의 전문적인 주부의 모습은 여전히 나에게는 요원한 것 같아 또 이내 씁쓸해진다.
40대에 들어서며 어디에서 나이를 밝히기가 꺼려진다. 나이가 많게 느껴져 그런 것이 아니라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처럼 비칠까 두려워서이다. 어린아이를 키우며 하루하루를 그저 헤쳐나가던 시기에는 빨리 40대가 되고 싶었다. 빨리 애들도 키우고 사회적으로 성장한 어떤 그런 중년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하루하루를 바둥대며 살아가던 내가 그런 40대가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 나이를 밝히기가 쑥스럽다. 열심히 한다고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살아간다고 느끼면서도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요즘 들어 전년도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닳아만 가고 있는 기분이랄까.
수업 자료를 찾으려 여러 칼럼들을 훑어보다가 한 정신과 의사의 칼럼을 보게 되었다. 우울증은 현재 시제에 살지 못하는 때에 온다고. 그러니 미래나 과거를 지나치게 생각하면 우울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우울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지난 과거를 불행하게만 생각하는 것도 낙관하기만 하는 것도 이내 허무에 닿는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문득 나에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씁쓸함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매일을 열심히 살면서도 나는 지난 과거의 무용함과 미래의 불확실함에 씁쓸했던 것이 아닌가. 쉴 틈 없이 일하면서도 내내 확실한 내일의 행복을 알지 못해 나는 불안했던 걸까.
그렇다면 확실한 지금의 행복을 찾아 나서야 할 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것들을 해주는 일일테다.
해야 할 집안일들을 미루고, 노트북을 켜고 하고 싶은 글을 써 본다. 사두기만 하고 넘기지 못했던 책장들을 넘기며 읽는다. 묵주를 들고 집 앞 천변으로 산책을 나가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어느덧 꽃은 지고 연둣빛 잎들이 짙은 녹색이 되어 간다.
다양한 일의 연속으로 일상을 채운 나의 요즘은 오히려 나를 공허하게 만들어 나가는 것 같다. 일하는 것만큼이나 의식적으로 일상 곳곳에 쉼표를 찍어 깊은 호흡을 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하겠다. 그래서 밤에 침대에 누웠을 때 제자리걸음만 한 것 같은 초조함이 아닌 오늘 내가 찍은 쉼표를 떠올리며 잠들고 싶다. 그런 순간으로 쉼표를 찍은 하루를 상상해 본다. 상상만으로도 여유로워지는 기분이다.
어린 시절 내가 바라던 나의 40대는 여전히 요원하고 그런 중년에 도달하는 일이 지난한 여정처럼 느껴지지만, 지금의 씁쓸함을 자양분 삼아 툭하면 쉼표를 찍고, 더 빨리가 아닌 천천히 나의 속도로 나날을 살아가야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또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그리고 이왕 이렇게 모자랄 거라면 그냥 쉼표나 팍팍 찍으며 여유롭게 지내야겠다.
오늘은 좋아하는 시인의 북토크가 자주 가던 동네 책방에서 있었다. 마침 오늘은 시인의 생일이었다. 시인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초록을 입고' 만났다. 각기 다른 각양각색의 초록을 보니 눈이 싱그러워졌다. 함께 케이크를 나눠 먹고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실컷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초록을 입고 찍은 쉼표가 다음 주도 나를 살게 할 것 같다. 나의 쉼표를 더욱 응원해주고 싶은 날이다.
잘 살아 있느냐고 묻는 대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어야지. '지금'을 찌르는 대신, '지금까지'를 어루만져야지. 이는 마음을 쓰는 일일 것이다.
모든 쓰기는 결국 마음 쓰기다.
<@ 오은 '초록을 입고'>
끝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일요일의 밤. 마음을 써서 글을 써본다.
<@표지사진은 비 내리는 일요일, 빵 사러 갔다가 커피 한 잔이 고파, 남편과 눌러앉아 라떼를 마셨다. 문득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