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들이 데려다주는 세상
일상생활의 내 생각이나 감정을 글로 써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패드와 함께 사용할 키보드를 검색했다.
여러 회사의 키보드들이 있었지만, 내가 사용하는 패드의 제조사에서 만든 패드 커버와 일체형으로 되어 있는 키보드가 가장 좋아 보였다.
물론 가장 좋아 보인만큼 가격도 가장 비쌌다.
그래도 글을 쓰려면,,, 노트북도 아니고 키보드인데,,라며 덜컥 구매 버튼을 눌렀더랬다.
그로부터 일 년 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키보드는 그저 급한 메모를 작성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내 패드와 일체 되어 있지만 사용 되지를 못했다. 그러던 중 친한 샘과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고 마침내 나도 글이라는 것을 쓰게 되었다.
‘일 년 전에 키보드를 사두길 얼마나 잘했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바로 쓸 수 있잖아!’라고 생각했지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키보드를 산 지 일 년여만에 첫 글을 쓴 거다.
키보드뿐이 아니다. 어떤 운동을 시작할 때도 나는 운동 도구 및 운동복을 잔뜩 구입한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저렴한 걸 사기도 하지만 이미 들인 돈이 있어야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자꾸 장비를 사게 만든다. 요가 매트도 폼롤러도 내 선택을 기다리며 거실 한편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그것들을 꺼내 운동하는 날은 사실 많지 않다.
이렇게 장비가 잘 갖춰줘도 무언가를 시작할까 말까인데, 사실 내 일체형 키보드가 얼마 전 장렬하게 전사했다. 사실 구입한 시기에 비해 사용량이 많지는 않았는데, 시간엔 장사가 없는 것인가. 내 키보드는 그렇게 무용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노트북을 꺼내야만 한다.
패드는 열기만 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노트북은 전원이 들어와 브런치에 들어오기까지의 시간이 왜 이리 길기만 한지,,,, 그렇게 브런치와 멀어져 갔다.
바쁘다는 핑계로 소중한 것들을 자꾸 미루던 나날. 얼마 전엔 갑작스러운 학교의 일들 덕에 한 달을 기다려서 만나는 글쓰기 모임마저 미루게 되었다. 해야 할 일들에 치여하고 싶은 일을 미루고 사는 내가 참 마음에 안 들던 요즘이었다.
그래서 다시 블루투스 키보드를 샀다. 하루면 배송되는 세상에서 나는 왜 구매 버튼을 누르지 못했는가.
장비가 생겼더니 어제도 글을 쓰고 오늘도 글을 쓴다. 쓰는 사람이 결국 남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도 남기지도 못했던 내 지난 몇 달이 아깝게만 느껴진다.
키보드를 산 돈이 아깝지 않게 다시 열심히 두드려볼 생각이다. 머릿속이 복잡해 어지러웠던 요즘이었다. 내 머릿속의 실타래를 타닥타닥 풀어내야지.
이런 결심조차도 값지다.
써야겠다고 생각했더니 열심히 읽고도 싶어졌다.
언제 또 읽고 싶어 질지 몰라 이럴 때를 대비해 틈틈이 책을 사 두었었다.
침대에 기대앉아 얼마 전 사둔 소설을 저녁 식사 후 단숨에 읽어냈다.
이렇게 내가 준비한 장비들이 미루기만 하고 가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데려다준다면 그 값은 전혀 아깝지 않다
그렇게 틈틈이 준비해 둔 나만의 장비로 읽고 쓰는 삶. 그 경이로운 지점에 일하느라 지친 나를 데려다주고 싶다.
(@표지사진은 동네 책방에서 혼자 책 읽었던 휴식시간, 휴식은 언제나 책과 커피라는 장비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