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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Aug 20. 2024

제주에 다녀왔다.

무지개의 응원을 받고 돌아온 시간

일이 너무 많아 지친다는 말도 지치던 때였다. 고개를 돌려보면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바쁘던 때, 바쁘면서도 바쁘다고 감각하지도 못했다. 한숨 돌리고 싶었지만 꽉꽉 찬 일정들이 나를 몰아치고 있었기에 당장은 휴식이 요원했다. 그래서 여름쯤에는 떠날 수 있겠지.. 하며 가지고 있는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네 명 모두 떠나려면 가지고 있던 마일리지로는 제주가 유일했다. 물론 돈을 좀 더 보태 떠날 수도 있었으나 낯선 나라는 또 여행을 준비해야 하니, 그때의 나는 여행 준비도 벅찰 때였다. 그렇게 제주도 항공권을 예약하고, 제주도에 가니 한라산이나 한 번 더 올라갈까 하며 한라산 근처 숙소를 1박, 남은 일정은 함덕 해수욕장 근처의 숙소를 예약하고 여름의 휴가 계획을 채워 넣었다.


여기까지가 나의 준비의 끝이었고, 여행 이틀 전에 차를 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부랴부랴 렌터카를 예약하는 것으로 여행준비를 마쳤다. 별다른 준비 없이 그렇게 날아간 제주는, 그저 마냥 좋았다.

한여름의 제주는 상상 이상으로 뜨겁고 덥지만, 또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다. 바다도 산도 모두가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뉴스에 연일 제주도의 물가에 대해 나오던 때라 성수기였음에도 생각보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예상치 않게 고즈넉함도 종종 마주했다. 무덥지만 제주의 산과 바다 노을과 뙤얕볕 모두 일상에 지친 나에게는 휴식이었다.



이번에 별다른 준비를 못했으면서도 제주에 가면 하고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1번은 한라산 산행. 2번은 그저 휴식. 3번은 요가 원데이 클래스 가보기였다.

한라산 등산은 나만 원하는 것 같았지만, 한 학기 내내 나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던 세 남자는 묵묵히 따라가 줬다. 산을 좋아하는 엄마이자 아내라 미안했지만, 한라산을 걷는 내내 다시 와서 나는 참 좋았다. 비록 백록담에 다다랐을 때 안개가 심해 백록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백록담을 보러 올라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상관없었다. 하지만 짙은 안개에 다소 실망하는 둘째에게

" 백록담은 못 봤지만, 백록담까지 올라오느라 한 우리 노력은 우리 몸에 근육으로 남아 있을 거야.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해도 못 이루는 일들이 있는데, 그 노력은 어디 안 가고 나한테 남아 있는 거야."라고 철학적인 잔소리를 하는데 옆에서 큰애가

"근육아 아니라 근육통으로 남을 거 같은데,,,?"라며 심드렁했다.

그러나 다음날 근육통은 애들이 아닌 나와 남편에게만 남았다. 하.. 젊음이여,,,

성큼성큼 올라가는 둘째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났다. 아닌가,,, 젤리를 먹었기 때문일까…?


한라산 산행을 마치고 남은 일정동안 우리는 함덕에서 주야장천 쉬었다. 바다에서 노는 막내와 큰애를 보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되었다. 막내가 새까매진 얼굴로 웃는 소리는 어떤 음악보다 내내 나를 행복하게 했다. 파도소리와 함께 아들의 웃음소리를 내내 듣는 그 바다에서의 시간은 지난 일상의 노고를 치하해 주는 느낌이었다.

제주 바다는,하늘은, 노을은 다 사랑입니다.


마지막 날은  나의 제주 버킷리스트에서의 마지막 요가 원데이클래스가 있는 날이었다. 가족 여행이기에 가족들의 일정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새벽 6시 30분 타임으로 예약했다. 숙소 근처의 도보 10의 요가원이었으나 새벽에 혼자 걸어가는 건 위험할 수 있다며 남편이 라이드를 해주겠다고 이야기하던 중 큰애가 덜컥 자기도 하고 싶다는 것 아닌가. 이 원데이 클래스 비용은 3만 원이라 니가 새벽에 안 일어난다면 엄마가 진짜 화가 날 것 같다고 말하는 데에도 큰애가 자기도 한 번 요가원에 가보고 싶었다며 굳세게 간다는 것이다.

보기만 해도 평화로워지던 요가원.

큰애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 여행 내내 '심드렁'을 맡고 있었던 중2다. 중2니까 어련하겠냐며 내내 못 본 체했지만 숙소에서 내내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것도, 막내가 혼자 바다에 들어가 있는데 따라 들어가 주지 않는 것도 실은 조금 미웠었더랬다. 그래도 여행이니 내내 가족의 평화를 위해 못 본 체했던 나인데, 요가를 같이 가겠다니 좋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들과 함께 새벽길을 나서 요가원에 들어가 요가를 했다. 멀리 한라산이 보이는 요가원에서 큰 통창으로 하늘과 산을 바라보며 하는 요가는 정말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물론 새벽이라 몸의 근육들이 다 깨어나지 않았고 며칠 전 산행으로 내 몸이 내 말을 안 듣던 때였지만, 동작의 가능성과는 별개로 마음만은 참 평화로웠다. 함께 온 아들은 나보다 더 동작이 안 되어 내내 웃음 짓게도 했다. 뭐지 이 순간은. 사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평화로움인데. 조금 미웠던 마음이 이내 녹았다.

요가를 하던 중에 잠깐 소나기가 내렸는데 요가를 마치고 나니 소나기는 그치고 짠하게 무지개가 짠하게 떴다. 무지개라니 살면서 몇 번 보지 못한 신기한 자연현상이다. 요가하던 중에도 요가 후에도 내내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여행 내내, 아니 여행을 오기 전에도 나는 내내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맡은 학교에서의 책임도, 그러면서 엄마로서의 역할도 모두 다 잘 해내야 한다고. 때로는 부족함과 모자람을 보고 이내 좌절하고 자책하며 나를 계속 다그치던 나였다.  다른 이의 실수나 부족함은 관대하게 바라보면서도 왜 나 자신에겐 그게 어려운 것일까 싶었는데 요가를 하고 마주한 무지개가 동동거리던 내게 격려와 다독임의 빛을 주었다.


무지개의 배웅을 받으며 아이와 함께 요가원에서 걸어 나오는 길이 몹시도 편안했다. 열 발자국 걷고 나면 아빠에게 데리러 오라고 하자며 징징대는 그 모습마저도 귀여울 만큼. 나에게 징징대는 것은 나에게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겠지라며. 승화해 본다. 숙소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는 아직 사춘기의 습격을 받지 않은 막내의 품도 그리워졌다. 더불어 이 모두의 예민함 안에서 수고했을 남편도. 나만의 노력이 아니라 모두의 배려와 노력으로 가족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아이의 사춘기를 더 품어주어야지. 이상하게도 마음이 더 넓어진 것 같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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