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에 엄마아빠가 무슨 선물을 주실까 기대하던 어린이는, 무럭무럭 성인으로 자라난 2020년 5월 5일, 지가 지한테 선물을 주는 어른이가 되었다! 올해 나의 어른이날 선물은 뮤지컬 '드라큘라' 티켓이었다. 사실 잘 모르는 극이기도 했고, 넘버도 처음에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데다가, 시국도 시국인지라 그냥 넘기려고 했던 극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실결을 한 이유는 조정은 배우 때문이었다. 조정은 배우님이 인터뷰에서 이번 드라큘라 3연이 아마 본인의 마지막 미나가 될 것이며, 그 이유는 '나이가 많아서'라는 망언(?)을 하셨던 것이다. 이번에 보지 않으면 평생 조정은의 미나를 보지 못하게 될까봐 현생과 시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실결을 하고 말았다.
2020. 05. 05. 뮤지컬 '드라큘라' 14시 공연 캐스트 보드
결론부터 말하자면, 취향이 아닐 것 같다는 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드라큘라는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운 극이었다. 그 지점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려고 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읽으시는 분들께 주의를 요망한다.
1. 조정은의 '미나 머레이'
사실 1막 서사는 전생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아서, 솔직히 드라큘라에게 끌리는 미나의 서사 자체가 조금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은 배우님의 연기 디테일이 1막의 개연성의 결핍이 둘의 인연이 곧 강렬한 필연이며 운명임을 보여준 것이라고 나를 설득해줬다. 특히 2막에서, 결국 드라큘라를 선택해서 뱀파이어가 된 다음에도 끊임없이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에서 갈등하는 연기가 인상깊었다. 특히 최면 상태에서 부르는 'Train Sequence'에서 잠깐 드라큘라의 생각과 동화되어 'Life After Life'가 리프라이즈될 때, 싸늘한 냉소를 머금고 노래하는 선녀의 디테일은 정말 소름돋았다.
'Deep In The Darkest Night'이 끝나고, 드라큘라의 성으로 무대가 넘어가는 도중에 반 헬싱이 단상에서 내려오는 미나에게 손을 뻗는데, 그 손을 잡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내려가는 것도 깨알같이 좋았다. 무대가 전환되는 순간까지도 놓치지 않는 디테일한 연출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출처 : OD 컴퍼니
"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제 목숨을 끊어주세요.
제게 삶보다 죽음이 낫다고 판단될 때 말이예요."
아주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 대사가 미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미나는 마치 < 지킬 앤 하이드 >의 '엠마 커루'를 연상시키는 외유내강의 끝판왕이었다. 아니, 아니다. 엠마보다 더 강하다. 드라큘라에게 아주 살짝 물렸을 뿐인 루시도 순식간에 그에게 사로잡혔던 것을 생각하면, 영생을 목전에 두고도 이를 거부하고자 하는 미나의 선한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타이틀롤인 드라큘라보다 < 드라큘라 >라는 극의 서사의 중심을 가장 탄탄하게 잡고 있는 인물이 미나인 것 같다.
그리고 조정은 배우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곱고 맑은 소리를 내는데, 그 음색 안에 선과 악, 이성과 본능, 절제와 욕망을 모두 담아낸다. 그러면서도 성량은 마치 샤롯데씨어터의 천장을 뚫어버릴 것만 같다. 미나만큼이나 단단하고 탄탄하다. 그러면서도 노련하고 유연하다.
2. 이예은의 '루시 웨스턴라'
개인적으로 꼭 보고 싶었던 배우 중 한 분이다. 작년에 < 호프 >를 관람했을 때, 관극 직전에 캐스트가 바뀌어 아쉽게 만나지 못했었는데, < 드라큘라 >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 극에서 갭 차이가 뭔지 가장 제대로 보여주는 게 루시다. 그 갭 차이로 내 심장을 두들겨 패셨다. 사랑스러운 푼수떼기가 원치도 않았던 한순간의 유혹에 사로잡혀 영생을 갈구하고, 마침내 원하는 바를 얻었을 때 뿜어내는 광기의 아우라가.... 뱀파이어 슬레이브의 존재감이 아주 강렬했는데, 그보다 더한 강렬한 아우라를 혼자의 몸으로 내뿜어내 버리는 이예은 배우님의 역량이 놀라웠다.
영원한 삶 무덤은 필요없는 땅
우리 영혼 구원도 저주도 못해
이제 함께 달빛의 축복 속에서 사냥을 시작해
계속 보고 싶은데 퇴장이 생각보다 너무 빨라 아쉬웠다. 반 헬싱 서사가 너무 많아서 2막부터 그 부분은 좀 루즈했는데, 반 헬싱 서사를 조금만 줄이고 루시를 좀만 더 오래 살려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예은 배우는 노래와 성량, 대사톤이 정말 짱짱하다. 푼수떼기 연기할 때에도 아주 단단한 소리가 나와서 배우님이 노래를 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솔직히 'Life After Life'에서 드큘의 분량이 더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무덤에서 걸어나오는 그 순간부터 루시밖에 안 보였다.
3. 김준수 배우의 '드라큘라'
미나는 외유내강인데 비해 드라큘라는 완전 정반대인 외강내유의 캐릭터이다. 김준수 배우님의 드라큘라는 일단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의 광기 연기가 배우의 이미지와 정말 잘 어울렸다. 데스노트... 를 보지는 않았지만 여러 영상으로 접한 <데스노트>의 엘이 생각났다 확실히 퇴폐미 있는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듯. 'Fresh Blood' 씬에서는 정말 드라큘라 재질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아이돌을 오래 하셨던 분이라 유연하게 몸을 잘 쓴다. 아주 작은 제스처도 더 커 보이고, 어떤 제스처를 어떻게 해야 더 멋있게 보이는지 너무 잘 아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내 취향이 아니어서 솔직히 샤큘은 불호...ㅜ(그래서 사실은 전동석 배우님이나 류정한 배우님을 보는 게 목표였는데 시간이 안 맞았음) 가수 활동 하실 때에는 한 번도 준수 배우님 목소리에 불호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확실히 뮤지컬에서 내 남자 배우님들 음색 취향은 굵은 목소리인가 보다. 파워는 좋았지만 음색 자체가 너무 얇은 미성이라 오히려 듀엣이 가장 많은 조정은 배우님과 잘 안 묻었다고 느낌. 뭐 참사가 일어난 게 아니라 잘하셨는데 취향에 안 맞았던 관극은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 같다.
5. 무대
그동안 < 지킬앤하이드 >부터 시작해서 < 스위니 토드 >, 그리고 < 드라큘라 >까지. 어쩌다 보니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오디 컴퍼니가 샤롯데씨어터에 올린 극을 모두 보게 되었다. 내가 본 오디 컴퍼니의 극 중 가장 오디가 무대에 진심인 극이 드라큘라였던 것 같다. 아니, 오디극에만 갇힐 게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극들을 다 통틀어서 제작사가 이토록 무대에 진심인 극은 처음 봤다. 일단 무대가 원형으로 회전하는 턴테이블 형식으로, 일단 사건이 전개되는 배경 자체가 정말 많다. 드라큘라의 성부터 묘지, 미나와 조나단의 집 등에 이르기까지 무려 10개나 되는 공간적 배경을 턴테이블 위에 모두 재현해냈다. 심지어 웅장하게. 거기다 또 'Train Sequence'에서는 드라큘라가 공중에서 관을 타고 내려오고, 드라큘라의 침실에서는 관 안에서 다른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끔 이동 경로가 내부에 마련되어 있기까지 하다. 대환장.
그 수많은 공간을 하나의 무대에 모두 올린 공간 구성 능력부터 대단한데, 'It's Over'에서는 턴테이블이 마구 회전하면서 모든 공간이 다 뒤섞인다. 이때 무대의 현란한 무빙과 거기에 맞춰 완벽하게 동선을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모습에, 학창 시절부터 적성검사 하면 공간지각능력이 바닥을 찍었던 문돌이의 입은 딱 벌어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게 했다. 무대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리면서, 시공간의 질서를 다 어그러뜨릴 만큼 드라큘라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으며, 이 힘을 시각적으로 너무 멋있게 잘 표현한 덕분에 그런 강력한 존재마저도 미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만큼 이를 뛰어넘는 사랑의 힘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6. 극과 음악
음악은 MV를 통해 들었을 때보다 공연장에서 실제로 들으니 훨씬 좋았다. 자막을 하긴 하겠지만 동큘과 류큘이 소화하는 드라큘라 넘버도 너무 궁금하다. 만약 동큘의 'Fresh Blood' 뮤비가 나오지 않았다면 못 참고 자둘했을 지도 모르겠다... 특히 가장 메인 넘버들이라고 할 수 있을 'Fresh Blood'와 'Loving You Keeps Me Alive', 그리고 'Life After Life'가 좋았는데, 그중에서도 'Life After Life'가 가장 내 취향이고 에너지가 좋았다. 드라큘라와 루시의 시너지가 아주 강력했던 곡. 거기다 항상 오케스트라 반주에만 익숙해 있다가 오케스트라에 밴드 사운드까지 더해져 새로운 웅장함을 느꼈던 것 같다.
솔직히 나의 취향까지 전부 다 고려했을 때에는, 내용은 만족스러운 자첫자막용이었다. 인간의 생명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것을 영생의 존재를 앞세워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생(生)에 있어 가장 큰 두려움은 사(死)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극한의 공포는 불로장생의 헛된 꿈을 품게 하였다. 진시황제가 그러했고,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그러했다. 그리고 여기, 닿을 수 없는 누군가의 꿈을 '벌로써' 받은 한 남자가 있다. 마음 바쳐 사랑한 여인을 잃고 신에게 분노한 죄로 드라큘라는 피를 향한 갈증과 죽지 않는 육체를 받는다. 모두가 부러워 할 만한 불멸의 육체는 홀로 4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온몸으로 살아냈고, 그래서 공허하다. 빈 껍데기일 뿐이다. 미나를 만나고 사랑하는 이와 무덤이 필요없는 삶을 꿈꾸기도 하나, 그는 유한함의 가치를 이내 깨닫는다. 끝없이 갈망만을 해야 하는 삶을 그는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은 소중하다. 그러니 어제보다 오늘을, 오늘보다 내일을 더 값지게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