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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온 Oct 09. 2021

[뮤지컬] 둘 중 하나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210929 뮤지컬 <헤드윅> 후기 (조승우/이영미)


  그동안 수없이 많은 티켓팅에서 실패의 쓴 고배를 삼키곤 했지만, 이번 <헤드윅> 티켓팅처럼 조바심이 났던 적은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티켓팅에 뛰어들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승우의 공연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번처럼 "표를 못 구해서" 공연을 보지 못할까봐 불안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티켓팅에서, 정말 어렵게 어렵게 가장 뒷열의 표를 구할 수 있었다.


  헤드윅의 콘서트는 듣던 대로 대단했고, 강렬했으며, 신났다. 그러나 그 신나는 락 사운드와 찰진 드립들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 마음 속에 꼭 남아 있어야 할 감정과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다. 그동안 봐 왔던 뮤지컬과는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헤드윅의 2021년 시즌이 막바지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 이 글은 우리의 금발머리 락스타를 잊지 말자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다.



1. Hedwig



  인간은 복잡다단한 존재이다. 그런 복잡한 인간에게 성 정체성이란 하나의 단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린 그동안 생식기의 모양, 그 하나만으로 인간 전체를 정의내릴 수 있을 거라는, 건방진 생각들을 해 왔다. 말 그대로 건방지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성 소수자 문제는 지금에 와서도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다. 날 때부터 주어진 것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 사이의 갈등. 가치판단의 영역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사실 헤드윅이 던지는 메시지가 '성 소수자에 대한 존중'이라고 한다면 그건 몹시도 편협하다. 사실 헤드윅의 성별이 무엇인가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여러분, 헤드윅이 바로 그 장벽입니다.

헤드윅은 그 장벽 위에 서 있습니다."

- 뮤지컬 <헤드윅>, 'Tear Me Down' 중



  이츠학은 헤드윅을 이렇게 소개한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날 태어나, 장벽이 무너진 후에도 그는 쭉 장벽 위에 있었다. 경계에 서 있는 인간. 헤드윅이란 존재는 그렇게만 받아들이면 된다. 헤드윅이 보여주는 인간적 매력과 관능은 그저 그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헤드윅의 얼룩져 있는 삶은 그가 완전하지 않은 트렌스젠더여서도, 성 소수자여서도 아니다. 그의 모든 이야기의 우울한 구석들은 그가 실패한 트렌스젠더여서가 아니라, 그런 그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그들의 존재가 가시화되면서 그들을 향한 혐오와 공격도 함께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시종일관 유쾌했던 헤드윅은, 너무도 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다.



"내가 두렵니? 아니면 더럽니?"

- 뮤지컬 <헤드윅> 중



  깊은 슬픔에 잠긴 눈과 젖은 목소리로 치는 저 대사, 누구라도 마빡을 깨게 하는 조승우의 연기는 거기 앉아 있는 모두를 죄인으로 만든다. 그 자리에 단 한 순간도, 누구에게 편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성인군자는 앉아 있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지독하게 짙은 메이크업과 가발은 오히려 그를 가둬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그의 고백 어디에서도 자신을 여자로 느낀달지, 여자가 되고 싶었달지 하는 이야기는 없다. 그저 사랑하는 애인과 미국에 가려면 여성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수술대에 올랐다. 사랑과 페니스, 둘 중 하나를 갖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했을 뿐이다. 그리고 인생의 반쪽이라 믿었던 그 사랑이 떠나버리고 나니 그에게 남은 건 1인치의 살덩어리와 어머니가 넘겨준 헤드윅이라는 이름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그 이름으로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헤드윅의 선택을 마주하고 도망쳤던 토미가, 모두의 앞에서 그럼에도 그를 사랑했음을 밝힐 때, 그는 가발을 벗었다. 헤드윅이 자신의 성을 무엇으로 정할지는 그때부터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 작품은 헤드윅의 정체성을 어느 한쪽으로 확고히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정체성"을 찾아주려는 시도 자체가 어쩌면 헤드윅에게는 무례이자 폭력일 뿐이다.


  결국 그냥 한 인간을 존재하는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존중받고,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 너무도 흔하지만 누구 하나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 결국 사랑의 기원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헤드윅도, 이츠학도 둘 중 하나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도래해야 한다는 것. 그게 헤드윅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2. 음악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밴드 사운드 자체만으로도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묻히는데, 충아센 2층의 극악의 구린 음향 덕분에 초반 곡들 가사는 정말 안 들린다. 심지어 거의 이 극의 오프닝이라 할 수 있는 Tear Me Down은 가사를 다 아는데도 안 들렸고, The Origin of Love 전까지의 곡들도 마찬가지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The Origin of Love은 잔잔한 바이브도 있는 곡이라 들리기 시작했고, Angry Inch부터는 그나마 좀 들렸던 것 같다. 근데 진짜 전반적으로 모든 넘버들의 가사가 잘 안 들린다. 자첫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넘버들을 가사를 한 자 한 자 정독해가며 들어보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정말, 정말 안 들린다.


  락 장르를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Tear Me Down, Sugar Daddy, Wig In A Box는 진짜 신나고 즐겁게 보고 들었다. 정말 이때는 뮤지컬이 아니라 락페스티벌의 현장 한가운데에 와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신난다.



  이 곡들을 그저 신나게 즐길 수 있는 건 틸미다운 바로 다음에 나오는 The Origin of Love의 역할이 크다. 강렬한 밴드 사운드에 수위 높은 섹드립 가사가 난무하는 속에서, 오리진은 동화같은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로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를 작중 초반에 미리 제시한다. 이게 헤드윅의 서사 그리고 조드윅의 미친 감정 연기와 결합하면서, 이 헤드윅이라는 작품이 그저 자극적인 섹스 어필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란 존재와 사랑이란 관념에 대한 통찰을 담았음을 관객에게 전달해준다.


  이외에도 Sunny나 I Will Always Love You 등 시대를 타지 않는 불후의 명곡들을 조승우나 이영미의 목소리로 짤막하게 들어볼 수 있다는 것도 이 극의 쏠쏠한 재미.


  원래는 함성과 떼창,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이 가득한 공연이라고 하는데, 코로나 시국 때문에 많은 제약이 있음에 아쉬웠다. 진짜 소리지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꾹 참아야 했다. 가끔 예능에서 아이돌들 신나는 노래 틀어놓고 춤추는 거 참는 게임 하는 거 보고 그냥 방송용 컨셉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거 진심이다.

  배우들도 관객들의 높은 텐션에 더 익숙해져 있을 텐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게 공연을 끌어가는 것도 대단하다고 느꼈다. 훌륭한 공연을 보고도 커튼콜 때 기립조차 할 수 없는 이 시국 진짜....


다음에 또 헤드윅을 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땐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언니 왔다" 한 마디에 성대 혹사시키면서 함성을 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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