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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온 Jul 03. 2021

[책] 한 편의 여름의 녹음 (綠陰)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를 읽고

독서 모임 활동으로 처음 이 책을 읽었다. 근래 들어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소설이기도 하면서, 전체 필사를 따로 해 두었을 정도로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문장이 너무 아름답다. 화려하면서도 번잡하지 않다. 60년대 특유의 예스러운 문어체로 구어를 구현한 게 좀 어색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 읽어도 무척이나 세련된 작품이었다.


 <젊은 느티나무>는 부모의 재혼으로 인해 가족이 된 '이복남매의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다.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묶여 있는 이들의 사랑은, 현대에서도 쉽게 이해받기 어려운 부분이다. 60년대에 이런 소설이 창작되었다니, 이 작품이 당대의 사회와 문단에 얼마나 파격적인 존재였을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사회의 관념에 반(反)하는 이러한 금기를 어떻게 독자들에게 '설득'해냈냐 하는 것이다. 불편할 수밖에 없는 소재를 불편하지 않게, 오히려 아름답게 전달하는 것.  강신재의 언어가 가진 '서정성'의 힘을 주목하여 읽게 되었다.







 <젊은 느티나무>가 서정성을 확보해낼 수 있는 첫번째 요소는 이 작품이 '숙희'라는 주인공이 1인칭 서술자로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숙희는 열여덟 살의 소녀이다. 감정의 스펙트럼이 한 인간의 인생에서 어느 때보다 넓어지고 또 요동치는 시기이자, '이성', '성애'라는 새로운 관심사에 눈 뜨게 되는 사춘기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이다.


V넥의 다갈색 스웨터를 입고 그보다 엷은 빛깔의 셔츠 깃을 내 보인 그는, 짙은 눈썹과 미간 언저리에 약간 위압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으나 큰 두 눈은 서늘해 보였고, 날카로움과 동시에 자신(自信)에서 오는 너그러움, 침착함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듯해 보였다. 전체의 윤곽이 단정하면서도 억세고, 강렬한 성격의 사람일 것 같았다. 다만 턱과 목 언저리의 선이 부드럽고 델리킷하여 보였다.
‘키도 어깨 폭도 표준형인 듯하고……. 흐응, 우선 수재 비슷해 보이기는 하는걸…….’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채점을 하였다.


현규를 처음 만났을 때 숙희가 느낀 그에 대한 첫인상을 서술하는 이 장면이, 새삼 이 작품을 1인칭 서술자로 내세운 점을 작가가 얼마나 섬세하게 이용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는 '현규'라는 숙희의 사랑의 대상을 숙희의 입장과 관점에서 보게 된다. 그에 대해 어떤 감정에 대한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숙희에게 이입하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서술했을 뿐이고, 그 서술에는 그 대상에 대한 매력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다. 저런 남자라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독서모임에서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현규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마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현규를 사랑하는 숙희에게 이입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간접적인 감정 묘사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가장 큰 장점은 주인공의 심리가 아주 생동감 있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표면적인 장점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약수터 장면이나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편지 장면, 느티나무 숲에서의 마지막 대화 장면 등 뿐만 아니라 작품 전반적으로 아주 작고 사소한 행동에도 사랑의 희열을 느끼는 소녀의 감정을 충실하고 단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지점이 가장 잘 묻어나오는 부분은 단연 숙희의 내적 갈등에 있다. 숙희는 자신이 현규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현규와 가족 제도에 묶여 있다는 것 때문에 지속적으로 내적갈등을 겪는다. 이 내적갈등은 사랑에 대한 죄책감에 기인하기보다는 사랑의 희열을 온전히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에 가깝다.


  '오빠.'
  그것은 나에게 있어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 같은 어휘이다.
  그 무조리와 부조리에 얽힌 존재가 나다.
내가 잠시 지녔던 유쾌함과 행복은 끝내 나의 것일 수는 없고, 그것은 그대로 실은 나의 슬픔과 괴로움이었다는 기묘한 도착을, 나는 어떻게도 처리할 길이 없다.
확실히 내가 느껴온 기쁨과 즐거움은 이런 범주 내에서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자극에도 느끼는 커다란 희열은 숙희가 현실을 잊게 하고 오롯이 감정에만 충실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명시하는 현실을 자극하게 하는 환멸의 기제이기도 한 것이다. 작품은 그러한 기묘한 정서의 아이러니를 서정적으로 잘 그려낸 듯하다.







<젊은 느티나무>는 정말 감각적인 소설이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는 것 같다. 이 글의 제목을 '한 편의 여름의 녹음'이라고 정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읽다 보면 정갈한 숲 사이로 비치는 파란 여름 하늘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웃집 토토로>의 배경이 되는 숲과 마을이 자꾸 생각나는, 그런 지브리 느낌이 낭낭한...?



이 작품에 대해 얘기하면서, 첫 문장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 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첫 문장을 읽자마자 생각했다. 아, 끝났다. 그 수많은 향들 중에서 다른 것도 아닌 비누향이라니. 이 한 문장만으로도 우리의 첫사랑은 '비누향'이라는 감각 아래에 마구 조작된다. 애초에 강신재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도 청년에게 순간적으로 풍기는 비누 냄새가 감각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고 하는데, 몹시도 공감된다.


첫 문장을 통해 비누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로 '현규'라는 인물을 인식한다. 이 지배적 심상이 소녀의 감수성을, 우리의 감수성을 온통 자극하는 것이다. 비누는 향그샇면서도 깔끔한 향을 남긴다. 세지도 않고 그 잔향은 은은하다. 그러면서 비누는 더러운 것들을 씻어낸ㄷ. 그 자체만으로 '정화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처음 읽었을 때, 숙희가 '그의 누이동생'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밝히기 전까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끽해야 하숙하는 대학생과 그 집 딸 정도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갑자기 '누이동생'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눈을 의심하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사고가 '비누 냄새'가 갖는 깨끗하고 순수한 인상이 작용한 결과인 것 같다. 처음부터 이 작품에서 다루는 사랑을 타락과 욕망의 산물이 아닌, 그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품을 수 있는 '사랑' 그 자체로 그리고자 하는, 작가가 조성하고 싶었던 순수하고 서정적인 정서를 효과적으로 잘 표현해낸 것 같다.


이 작품의 서정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배경이 숲이라는 점이다. 하늘은 청명하며 햇볕은 밝게 내리쬐고, 인물들의 주된 활동반경은 녹음이 가득한 숲이다. 또 하나의 무대인 집 역시 바로 숲 옆에 자리하여 고즈넉하면서도 파릇한 이미지를 해치지 않고 있다.


숙희와 현규가 서로 간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소 또한 숲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밤에 우리는 어두운 숲 속을 산보하였다.
어두운 숲 속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안겨버렸다.




'푸름'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던 이전과 달리 이 부분에서의 숲은 어둡다. 문학에서 '어둠'의 기존의 이미지는 냉혹한 시련이나 암울한 현실상황 등 부정적인 것이다. 그런 이 부분에서는 여기서는 무엇이든 다 감싸안아줄 것 같은, 밤만이 뿜어낼 수 있는 포근한 밤 공기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


이후, 숙희는 어머니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규와 1년 간 단 둘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는다. 집이 비는 동안 두 사람이 눈치 보지 않고 함께할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단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이미 금기를 한 번 넘어버린 그들의 감정이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느끼는 두려움이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숙희는 다시는 서울을 찾지 않을 마음으로 원래 살던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곳에서 숙희가 찾는 뒷산의 공간은, 마치 그들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은연중에 주고받았던 서울의 S숲처럼 짙은 녹음과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색이 바래고 초라하게 말려’드는 꽃잎은 다시는 현규를 보지 않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끝막았다’고 생각하는 숙희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꽃잎을 뜯던 숙희는, 현규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자 젊은 느티나무를 안는다. 그리고 현규의 말에 그를 더 사랑해도 된다고 느끼며 느티나무를 안은 채 웃는다. 느티나무를 안으며 그들의 사랑이 긍정되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좌절되지도 않은 채 열린 결말로 서사가 마무리되는 것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느티나무를 사이에 두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나누는 두 인물을 마치 느티나무가 그늘처럼 감싸안는 듯한 장면을 연출해냄으로써, 두 사람 간의 사랑이 굴곡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느껴지게 한 것이다.


숙희와 현규는 이복남매이고, 그런 두 사람의 사랑은 잘못된 왜곡된 욕망으로부터 기인한 ‘금지된 사랑’으로만 형상화되어 통속적인 흐름으로 갈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따뜻하고 맑은 햇살 아래에 선 두 사람이, 청명한 숲속에서 주고받는 그들의 마음에서,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바람이 금기와 잘못된 욕망이라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그저 ‘사랑’으로서의 순수함만 남겨놓는다. 즉 시각적, 후각적 등 다양한 감각으로 형상화된 이미지들이 이복남매 간의 금기된 사랑을 순수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여러 모로 깊은 감명을 받았고, 좋아하게 되다 보니 이번에 문학비평론을 들으면서 이 작품을 대상으로 비평 과제를 수행했었다. 과제를 하면서 조사하다 보니 이 <젊은 느티나무>가 강신재의 영광이자 한계로 평가되는 의견들을 많이 접했다. 당시 문단의 분위기와 별개로 볼 수 없을 듯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참상과 그 비극이 던진 인간실존의 문제나 사회적 문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전후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거시적인, 혹은 사회적인 문제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만큼, 당대의 문단 입장에서는 문제의식이 결여된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 「젊은 느티나무」라는 작품은 인간 감정의 군상들을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 안에 서정적으로 녹여냈다. 모든 부조리와 금단을 아름답게 설득하는 서정적인 문장의 총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청량함을 잃지 않고 있다. 금기를 다루면서도 금기가 아닌 인물들의 감정에만 집중해서 읽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작가 강신재가 인간을 관찰하고 그 존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함에 있어 얼마나 애정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젊은 느티나무」의 문장들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낭만을 꿈꾸게 하는 힘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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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과제로 제출한 비평문의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아래의 문헌들을 참조한 과제임을 밝힙니다.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젊은 느티나무』,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화전집, 2007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와 비누냄새」, 『한국전후문제작품집』, 신구문화사, 1961

김영옥. 강신재 소설에 나타난 서정적 서술기법 – 정순이 젊은 느티나무 임진강의 민들레를 중심으로. 우리문학연구. 15

김정화(2007). 강신재 소설에 나타난 기법고찰 : 서정성을 부여하는 기법을 중심으로. 동악어문학. 48

이주형(2009). 1960년 초 소설의 두 양상 : 젊은 느티나무와 현대의 야의 세계. 한국현대문학연구 27

김미현(2007), 「비누 냄새와 점액질 사이의 거리」, 『젊은 느티나무』,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007

이호신(2015). 느티나무 아래에서. 숲과 문화. 24:5

김기원(2015). 우리문학과 산림문화 개관. 산림문화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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