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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온 Jun 16. 2021

[책] 사랑이 낳은 결핍, 결핍이 낳은 사랑

- 한지수, <야夜심한 연극반>을 읽고

매우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글입니다. 감상을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양해해주시고, 해당 작품을 모두 읽으셨거나 스포일러에 노출되어도 관련 없으신 분들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스물 여덟의 젊은 남자는 통일교에서 주재하는 국제결혼을 통해 일본인 아내를 맞았다. 한 가정이 생기는 순간이지만, 축복도 온정도 사랑도 없다. 그런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다. 아내는 아이를 거부했고, 출산하자마자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아버지이자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네 아버지는 여자가 됐어. 돌아오고 싶어도 이젠 못 돌아와. 그러니까 내가 네 엄마고, 네 아빠야.”


  엄마도 되어야 했던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라는 이름을 영영 묻어 두어야 했다.




  어느 날 딸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딸은 생애 전반에 걸쳐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그는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길지는 않아도 짧지 않은 생을 살았다. 어머니는 그의 곁에 남아 사랑을 주었으나, 머리가 크자 어머니는 그를 한국에 보내고, 자신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영상통화로 안부를 전했을 뿐이다. 그렇게 딸은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사랑과 원망이라는 양가의 감정을 안고 살았다. 오히려 성장해 갈수록 그는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고개를 쳐든다. 스스로도 ‘나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보다 나를 사랑해준 엄마에 대한 분노가 더 크다’고 고백한다.




  두 사람의 서사는 그녀가 전해 받은 한 편의 영상, ‘야夜심한 연극반’이라는 지점에서 교차되면서 그 공백이 채워진다. 자신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아이를 안고, 아버지는 여자 옷을 입었다. 그리고 아이의 아빠도, 엄마도 되어주기로 다짐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 하해와 같은 두 사랑을 놓고 어느 쪽이 더 크냐를 따져 묻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정보다는 모정이 더 익숙하고, 더 가슴에 와닿는다. 부모에게도 깨물어 더 아픈 손가락이 있듯, 양수의 포근함을 잊지 못하는 우리는 열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한 생명을 품어낸 그이가 유독 더 아프게 느껴지고, 그래서 더 필요하다. 깜짝 놀랄 때 우리는 ‘엄마야!’ 하고 외치지 않던가.


  그래서 아버지는 기모노를 택했다. 엄마이자 아빠가 되어야 했던 그에게 더 이상 호칭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보다 딸에게 필요한 이름을 택했던 것이다. ‘평생에 걸쳐 필요한 어떤 암호 같기도 하고, 세상에 보내는 신호’와도 같은, “엄마”라는 이름을 말이다.




  아버지는 딸을 몹시도 사랑했다. 엄마 없이 자라야 하는 딸이 결핍을 알았다. 그래서 그 결핍을 채워주고자 자기 자신을 버렸다. 그러나 그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 딸에게 더 큰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아버지는 딸을 한국으로 보내고, 자신은 일본에 남아야 했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그는 ‘엄마’로 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지극한 마음이 딸에게는 또 다른 결핍을 낳았다.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온 딸은 새 학교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온정 속에 무탈히 자랐으나 평생 그들의 세계에 들이지 않는 부모를, 부모의 세계에 발 들일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해야 했다. 그 자신도 딸과 떨어져 남은 생을 그리움을 씹어 넘기는 삶으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뾰족해진 마음이 조금은 닳고 무뎌졌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기모노를 벗었다. 사랑하는 딸을 수없이 품어냈을 납작한 가슴을 모두 앞에 드러냈을 때, 엄마는 비로소 아빠로 딸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시속 60킬로미터로 다가오는 상실의 순간들을 조심스럽게, 덤덤히 받아들인다. 아버지의 기억이 그 색채를 잃기 시작했을 때, 상실의 흑백 속에서 살던 딸의 기억은 비로소 색이 물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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