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은 대학로 그리고 내 본진 배우 이정화. 본진이 참여했다는 것뿐이 아니더라도, 제목부터가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코난 도일보다 아가사 크리스티를 더 최고로 치는 나로서는 밝혀지지 않은 그녀의 12일을 조명했다는 것 자체가 관심을 끌기에 더할나위 없이 충분했다.
1. 해석 (스포 대잔치입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우리는 참 많은 작품들을 소비한다. 그게 소설이 되었든, 영상물이 되었든 우리는 계속해서 누군가의 창작물을 읽고 보면서 사고에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그러나 우리는 그 창작물을 만들어낸 사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기회가 흔치않다. 특히 이미 자신을 드러내기엔 적절치 못했던 이전의 세대를 풍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물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크리스티의 작품을 비롯하여 여러 추리소설을 읽어도 보고, 추리 만화도 봐 보고 했지만 한 번도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작품 속에서 사람을 죽여 왔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본디 창작이라는 것은 영혼을 팔아야 한다. 특히 그것이 범죄나 인간의 파멸을 다룬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해 본 걸 재현해내는 건 그래도 할 만하지만, 한 번도 직접 행해본 적도, 관찰해본 적도 없는 행위와 그에 기인한 감정과 심리에 대해 상상만으로 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본 적 없는 것에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것이 모르는 사이에 제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층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 소설에서의 살인도 마찬가지다. 살인 행위 자체의 잔혹함을 묘사하지 않은 작가에게 그들은 '자극'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극의 시작 부분에서 단정히 앉은 아가사는,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은 살인이 재미있습니까?"
여기다 대고 '예'라고 대답하는 자를 우리는 사이코패스 같다고 할 것이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여러 서사 창작물에서 그 무엇보다 널리 소비되고 있는 것이 살인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우리는 하나의 유희로서 즐기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남들이 어떻게 소비하는가와는 상관없이, 극 속의 아가사는 결코 유희를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소설이 소설로만 끝나기는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써 내려간다. 그의 소설의 중심은 살인 그 자체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살인이라는 비인간적인 길을 걷게 되는지, 그 동기에 있다. 실제로 크리스티의 소설이 살인의 잔혹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사건에 얽힌 인물들, 혹은 그 주변인물의 심리 묘사에까지 치중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그의 소설은 추리만큼이나 범죄라는 하나의 올가미에 얽혀진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를 들여다 보는 심리 소설에 가깝다. 범죄의 자극이 아니라 인간의 내밀한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아가사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진다. 그리고 그 비난의 양상은 몹시도 이중적이다. 더한 자극을 강요하면서도, 그 소설가를 "머릿속에 온통 살인 생각뿐인 여자"로 폄훼한다. 아가사는 끊임없이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의 이중적 잣대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그리고 자신의 누군가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고, 누군가는 믿었던 마음에 배신의 칼을 꽂는다.
그리고 아가사는 로이를 만난다. 아가사에게 로이는 라비린토스 속 미노타우루스와도 같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지옥으로부터 옮겨붙은 불꽃 같은 존재. 인간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정의와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는 분노 사이에서 탄생한 존재.
극 속에 '로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아가사가 계속해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상기했듯 인간 내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독과 범죄로 풀어나가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범죄에 대해 사회에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니까.
하지만 결국 그에게 추리소설은 미궁 속 괴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살고 사람 때문에 죽는다. 특히 믿음이라는 것을 공유하면서 내 주변에 두었던 사람이 주는 상처는 이루말할 수 없이 깊다. 세간은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고, 남편은 딴 여자와 외도를 하고, 기자들은 자신의 사생활을 캐지 못해 안달이 나 있으며, 엄마처럼 따랐던 집안 사람도 그들과 함께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마치 세상에 막 내어놓은 갓난아이처럼 상처 아닌 것이 없는 삶. 뺨을 맞고 다른 한 뺨을 내어줄 만한 사람이 예수 말고 누가 있겠는가. 분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곧잘 넘곤 한다.
그 선을 넘은 분노가 아가사 스스로 자신은 미궁 속에 가두고, 제 안의 미노타우루스는 미궁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것을 '살의'라고 부른다. 아가사가 초반에 말한 "소설을 쓰는 것은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그 대사는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그에게 소설을 쓰는 것은 자신의 미궁 속 괴물을 마주하는 것. 그 괴물이 자신의 마음 속에도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수많은 혼란 속에서도 아가사는 자신만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추리 소설을 쓰면서 끝없이 제 속의 괴물을, 무표정을 한 채 묵묵히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것을 단순히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라는 그럴 듯한 포장을 해서 말이다. 로이와 독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밝고 높은 텐션을 보여주는 장면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가사의 펜촉을 움직이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여기에 있었을 지도.
넷플릭스에 판을 치는, 소위 '인간 본성'에 대해 다루었다는 작품들을 생각한다. <오징어 게임>에 대한 전 세계적 열광은 아직 현재 진행 중이고, 그 전에는 <스위트홈>이, <인간수업>이 있었다. 대충 내용은 알고 있지만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다. 솔직히,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이제 나에게는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에 관한 얘기는 끔찍하고 피로하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곧 공격성과 본능 억제의 역사와 같다. 우린 모든 세대를 통틀어 어떻게 내 안에 공격 본능을 잠재워야 하는지를 몸으로 각인해 왔다. <오징어게임>이나 <스위트홈> 같은 작품들은 그 역사의 흐름을 역행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 공격성이라는 게 억제되어 있을 뿐 소거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으나 사나 그것은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고, 그렇다면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가사의 소설 쓰기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안에 본능이라 칭해지는 공격성이 어디까지 날것 그대로 터져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걸 어떻게 억누르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되는 창구인 것이다. 아가사라는 극 자체를 그런 노선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미궁 속 괴물을 목도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건강하게 표출해야 하고 삶의 균형을 유지할 지에 대한 이야기로 말이다.
자신 안의 괴물에 더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스스로에게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았던 독을 선물하고 쓰러진 아가사를 보면서, 로이가 울지 말라고 속삭이던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회전 도시는 분들의 후기에 의하면 고정 대사가 아니라 그날 애드립으로 나온 작로이의 디테일이었다는 듯하다.) 이러한 로이의 마지막 인사는 어쩌면 삶의 균형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이 표현은 '아가사' 역을 맡은 이정화 배우님의 표현을 빌렸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작은 연민처럼 느껴진다. 그 연민은 미궁 속을 헤매이는 우리에게 붉은 실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2. 아가사 크리스티와 이정화
나는 개인적으로 셜록 홈즈보다 포와로나 미스 마플에 대한 동경이 더 큰 편이다. 작년쯤에 처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크리스티에 완전 치여서, 한동안 크리스티의 전 작품을 탐독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블로그에도 책에 관련된 리뷰를 몇 건 올렸었던 기억도 있다.(맞아요... 통째로 날려먹은 그 게시판.... 정신나간 글들 사이에 제정신으로 썼던 몇 안 되는 그 글들....) 그러면서 심심하면 한 번씩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검색해보곤 했는데, 그렇게 얻게 된 아가사 크리스티와 그의 작품에 대한 짧은 배움과 감상이 <아가사>라는 작품을 볼 떄에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됐다.
뮤지컬 <아가사>는 아가사 크리스티라는 사람과 그 작품을 잘 녹여낸 작품이었다. 인물의 관계는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떠올리게 하고, 작품의 반전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서술트릭을 연상하게 한다. 글을 정말 잘 쓰는 사람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도 상상만으로 잘 쓴다던 아가사의 말에, 안락의자에 앉아 머리를 굴리는 것만으로 사건을 풀어내던 미스 마플을 상상해본다. 아가사가 실제로 실종됐던 시기에 냈던 신문 광고를 조수 레이몬드가 쓴 소설과 관련시켜 그에게만 보내는 비밀 메시지라는 설정으로 녹여낸 건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화의 서사의 빈 공간들을 상상력이 적재적소에 잘 파고든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이정화 배우의 연기는 놀랄 정도였다. 늦덕인 지라 그동안 본진의 출연작을 세 작품 정도밖에 보지 못해서(지킬, 너글자, 왕복서간) 조심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본 작품 중에서 정화 배우가 맡은 역할들은 그 설정 자체가 썩 입체적이진 못하다는 생각을 해 왔었다. 캐롤은 시종일관 착하고 밝으며, 왕복서간이 주는 반전은 마리코의 캐릭터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엠마는 그나마 정화 배우가 디테일로 위선자 노선을 살려서 조금이나마 입체성을 부여하긴 하지만... 에휴 그냥 말을 말아야지 지킬 여캐들은....
아무튼 이런 역할만 봐 오다가 이번에 접하게 된 아가사는 충분히 입체적이었다. 처음에는 정의와 평화를 표방하며 살인을 혐오하는 추리소설 작가. 이건 너무 뻔하다.
항상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를 들춰내던 그녀가 그동안 외면했던 자신의 미궁 속을 들여다보면서, 사실은 그녀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다는 걸 자각하고, 그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부들부들 떠는 장면들, 그리고 마침내 로이를 통해 그 살의를 상상 속에서나마 마음껏 펼쳐보이는 극의 후반부는 절로 통쾌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사실 뮤지컬도 여자 캐릭터들이 부수적인 인물로 등장할 때가 많다 보니, 이런 입체적인 여캐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게 실정이다. 이번에 <아가사>를 보면서 타이틀롤의 위대함을 새삼 느낀다... 이렇게 입체적이면서도 여캐의 서사가 이 정도로 짜임새 있게 드러나는 극이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 탄탄한 이야기 속에서 날아다니는 정화 배우를 보면서, 여성 캐릭터의 타이틀롤의 저변이 더 확대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이정화가 그리는 아가사는 회색빛이지만 이정화의 노래는 금빛이 틀림없다. 특히 타이틀곡이라 할 만한 '꿈 속으로'는 정말 올해 들은 넘버 중 가히 최고였다고 할 만하다. 헤드윅 낮공을 보고 바로 아가사 밤공을 보고 온 건데, 헤드윅 때 들었던 넘버를 다 잊어버릴 만큼 '꿈 속으로'는 나에게 정말 강렬했다. 특히 커튼콜 때 다시 하이라이트를 부르는데.... 그냥 말이 안 나오고.... 앞선 커튼콜 데이에 박제된 영상이 많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진짜 요즘 거의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커튼콜 영상을 찾아보게 되었다.
'꿈 속에서'가 작품의 감정선과 서정성을 확보해주는 넘버였다면 그외에도 미스테리와 추리를 서사에 깔고 가는 극답게, 메인 테마인 '악몽'의 선율이 미궁의 분위기를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한다. 입장할 때부터 배경으로 깔아주는 곡인데, 미궁 속의 티타임의 BGM이 되어주기에 더할나위 없음이다.
이 작품에서 실제 아가사 크리스티란 사람이 살았던 생애와 비교하는 건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이미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극이라, 그것보다는 이 작품의 메시지와 극 속의 아가사가 얼마나 잘 어우러지는지가 관건인 극이라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이정화 배우의 티타임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홍차는 잘 우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