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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Oct 03. 2022

말의 가난

15분 글쓰기


나는 가난했다. 정확히 말하면 ‘결핍’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할 것 같다. 누군가는 ‘가난’이라는 단어를 놓고 대학 등록금 마감일에 입금 안 된 통장을 보던 순간의 절박함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옷에서 나던 고급스러운 섬유유연제의 향기 속에서 가난을 떠올렸다. 그리고 누군가는 학창 시절 친구의 소시지 반찬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던 자신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물려받은 교복의 소매가 7부 정도로 짧아서 창피했던 마음에 습관처럼 옷자락을 끌어 내리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에 비하면 나의 ‘가난’에 대한 하찮은 기억이 ‘가난’해지는 순간이다.      



유년 시절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성실한 부모님 덕분에 부족한 부분을 크게 느끼지는 않았다. 어려운 상황이 생겨도 부모님은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내게 가난의 상징으로 각인된  것은 초등학생 때의 엄마가 무심코 하셨던 말 한마디다. 당시 우리 집보다 잘 살던 막내 외삼촌네 들르셨던 외할머니는 딸에게 줄 만한 것들을 챙겨 오셨다. 당신 딸의 사는 모습이 늘 애처로웠다. 어린 나는 외할머니의 보따리를 보며 우리 집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딸을 챙겨주고 싶고, 사랑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 외삼촌네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던 각종 전집을 읽으라는 외숙모의 지청구에 나보다 몇 살 아래인 이종사촌이 툴툴거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하나 대충 꺼내서는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로서는 신기하고도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는 고작 단행본 몇 권이 전부였는데 마치 서점의 진열장 같은 책들을 놓고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은 게 배부른 행동처럼 보였다. 물론 시키면 더 하기 싫은 법이지만 어린 나는 그것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종종 막내 외삼촌네 가는 날이면 각종 진기한 이야기가 담긴 전집들을 하나씩 꺼내 읽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엄마, 우리 집에는 왜 책이 별로 없어? 나도 **이처럼 책 좀 사줘!”,“책? 책은 무슨! 책 살 돈이 어딨어?”라고 하셨다. 나의 요구는 보기 좋게 묵살됐다. 삶의 고단함 속에 묻어나는 엄마의 말은 가난했다. 그 순간 나는 가난의 쓴맛이 느껴졌다. 책 살 돈이 없다는 것은 먹을 쌀이 없다는 것과 같은 큰 충격이었다. 문방구에서 팔던 천 원짜리 미미 인형을 못 샀을 때,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갔을 때 마음에 꼭 들던 예쁜 옷을 못 샀을 때도 괜찮았다. ‘고작 책을 사달라는 것이 그렇게 핀잔받을 일이었을까’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책을 보겠다고 하면 대견해야 하는 게 보통의 부모가 아닐까?’, ‘엄마가 안 사준다면 내가 사면 되는 거지 뭐!’라며 슬며시 오기가 생겼다.     



드문드문 받던 용돈을 모아 학교 앞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평소에는 가서 구경만 하고 왔는데 모처럼 책을 살 수 있는 날이라 제법 신이 났다. 헌책방 특유의 낡은 책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는 줄 모르고 책을 골랐다. 언제 또 살까 싶은 마음에 제법 신중했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책을 사는 재미를 알아가던 나는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할 무렵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적금의 노예(엄마의 강제 적금)에서 벗어날 무렵부터 책을 원 없이 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릴 때의 물질적 결핍으로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정신적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책을 사들였다. 누군가 내게 “와, 책 한 번 진짜 많다. 그런데 이 책들은 다 읽은 거야?”라고 물었을 때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읽고 싶은 책과 읽는 속도가 맞지 않아서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 욕망의 키만큼 쌓였기 때문이다. 진득한 책과의 연애는 꽤 오랜 시간이 들었다. 그렇다고 발췌독할 요령이 당시에는 없었다. 본디 모든 책 안에는 배울 것이 있는 법이고 오타가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책에 대한 경외심이 남달랐다. 책을 많이 읽어도 원하는 만큼 성장을 못 했던 것은 바로 비판적 사고가 결여된 채로 읽어서였다. 책에 대한 결핍으로 그저 읽는 행위에 머물렀었다.      



엄마의 말이 그 당시 가난하지 않았다면, 다른 말로 에둘러 나의 요구를 지연시켰다면 어땠을까? 엄마로 인해 가난이자 결핍이었던 책은 허기짐에서 정신적 배부름과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었다. 결국은 가난도 결핍도 받아들인 자의 몫이다. 불평, 불만만 하기보다  자신의 자원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상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진정한 승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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