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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Dec 04. 2021

북위 55도 46분 - 51도 29분 바이칼을 만나다.

주(註)가 되는 책 이야기


나의 독서 습벽은 제일 먼저 작가의 프로필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 책에는 없지만 간혹 작가의 사진이라도 나와 있으면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한다. 책과의 연애를 위한 예열 신호인 셈이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작가의 이메일 주소가 있으면 연애편지를 쓰듯 작가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 책을 만나게 된 경로는 이러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연재되는 작가의 여행기를 보며 내심 출간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연재되는 글을 보며 나는 적지 않게 흥분했는데, 그 흥분을 애써 깊은 곳에 유보해 두었다. 아마 지금처럼 이렇게 멋진 책이 나오리라는 기대감이 있어 달뜬 마음의 유보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연히 작가의 프로필 사진을 보았다. 얼굴 어디서 그런 맑음이 숨어 있다가 못 견뎌 활자가 되어 나오는 것일까? 필시 작가의 안에는 소년이 살고 있을 듯싶다.  <<나는 연 날리는 소년이었다>>라는 책의 제목이야말로 스스로를 함축적으로 설명한 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격랑의 청춘을 안고 살아온 내공이 어떨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글 안에는 신의 원고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감히 말하건대, 그는 신의 원고지를 살짝 빌려와 열심히 바이깔을 그려나갔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저리도 맑은 영혼을 가질 수 있음은 바로 바이깔의 힘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바이칼을 수식하는 말들은 참 많다. 시베리아의 초승달, 시베리아의 푸른 눈, 겨울 심장, 얼음 바다, 영혼의 피정지, 샤먼의 바다, 영혼의 정화수, 빛의 향연장, 어머니의 태반, 시베리아의 진주, 한민족의 시원, 지구의 자궁.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말이 없고, 저마다의 바이칼을 품고 있는 활어들이다.  항시 바이칼을 향한, 러시아를 향한 촉수를 전방위로 뻗어 놓고 사는 내게 이 책은 기꺼이 열정의 불쏘시개가 되어주었다. 글이 참 맑다. 마치 바이칼 호수를 들여다보는 듯, 아니 바이칼의 청정한 호숫물을 한 모금 마신 기분이랄까? 글자 그대로 청산유수(靑山流水)다.


나는 바이칼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 정말 부자네요", 라는 말을 건넨다. 진의를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그저 여러 여행지 중에 하나일지 모르겠다만 나에게는 바이칼을 빼고 내가 존재할까 싶다. 이미 한번 다녀옴으로 인해 정화가 되었을 사람들이 나는 참 부럽다. 때가 되면 내 안의 눈물과 바이칼의 호숫물과 맞바꾸고 와야겠다. 바이깔은 나의 호곡장이 되어 줄까.


 얼음을 보다가 내가 그대에게 얼마나 차가운 얼음이었는지를 깨달았을 때, 그대 또한 나에게 어쩔 수 없는 얼음이었음을 보았을 때. 어느새 얼음에 실오라기만 한 균열이 생기고 그러다 우리 사이의 안타까운 간격마저도 없어져 끝내 하나네 이르듯 화해의 잔을 들고 싶었다.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난 구절이 있다.  


얼음과 얼음이 키스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영원히 입술이 붙어 버리는 거야. 꼭 붙어서 꼼짝 못 하고 함께 거대한 얼음바위가 되어 가는 거지

  문성혜<<그린란드에도 꽃이 핀다>>

 얼음끼리 녹아 화해를 하듯, 얼음과 얼음이 키스하듯. 이 모든 것은 바이칼이 아닌 곳에서는 무의미하리라. 바이칼의 겨울을 만난다면 기억 속에서만 살고 있는 애련과 진정으로 화해하리라. 그리고 스스로를 용서하리라.


 바이칼의 차가운 겨울을 생각하면 내게는 두 가지 풍경이 오버랩된다. 최명희의 <<혼불>>에서의 한옥(허름하고 낡은 마치 초가집 정도의 양반집)의 초입에 서 있는 나목과 베일듯한 빙륜과 새벽 어스름한 푸른빛 감도는 골목길 정경. 그리고 이광수의 <<유정>> 속에 나오는 바이칼의 풍경이 파도가 되어 밀려오다 그대로 정지된 상태. 사진 속의 눈은 마치 휘핑크림 같고 곱게 흩날리는 눈가루는 슈가 파우더. 바이칼의 정화수와 자연이 빚어내는 맛깔스러운 재료로 세상에서 제일 맛난 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들과 낭만적 감흥이 부족한 이에게는 나의 작은 소망이 사치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만. 바이칼의 물과 비와 바람과 구름, 호수 위를 걸어 보고 싶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 속에 별의 이중주를 듣고 싶구나. 하늘의 별과 지상의 별소리를 들으러 언제쯤 길을 나설 수 있을까?


1. 미세한 얼음 결정(結晶)들이 한밤중에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데, 시베리아 사람들은 그 소리를 '별들의 속삭임'이라 부른다. - Звездный шепот
2. 숨을 내뱉는 순간 수정구슬처럼 얼어붙은 숨결이‘별들의 속삭임'처럼 살랑살랑 소리를 내며 소나기처럼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 샤먼의 코트 -     

 

 얼음 우는 소리,라고? 그것은 또 무얼까?  세상에는 참 소리가 많지 싶다. 위에서 언급한 별들의 속삭임, 바이칼 호수에 내리는 빗소리, 바람이 우는 소리. 그런데 얼음이 우는 소리라.  얼음에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가 들릴까?  아니면 바람이 불어 얼음의 표면과 맞닿을 때 들리는 소리일까?  여하튼 그 소리 한번 들어보고 싶다.  다시 한번 검색어에 넣어본다. 바이칼에서 들을 수 없다면 글 소리라도 들어보고 싶어서이다.  상상력의 부재인가? 얼음이 우는 소리는 다름 아닌 큰 저수지에서 얼음이 깨지면서 내는 소리란다.


 끙! 끙! 얼음이 우는 소리가 마음을 저리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얼음은 마치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에 속병을 앓는 청춘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귓불 떨어질 듯 세찬 바람 속에서 나는 그저 넋 놓고 멍하니 얼음 우는 소리만 듣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 울음소리는 호수의 비명일지도 모른다고, 아니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 비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최성수 기자-


 나는 또한 바로 이 콩고드 지역에서 절친한 나의 친구인 호수의 얼음이 우는소리를 들었다. 마치 속이 좋지 않아 나쁜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는 것만 같다."... -『월든(Walden)』 -


 소로 책의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서로에게 물들기라도 한 냥 하늘과 호수의 빛이 하나이다. 시리도록 푸른빛을 가진 바이칼. 나는 언제쯤 그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여행작가 강석환 씨의 바이칼 사진

새로운 책으로 안내받을 수 있는 주(註)가 되는 책 이야기를 바라며- by 간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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