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 교정을 마치고 전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 시간이 남아서 서점을 둘러보는데 앞선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뜬금없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왜 네가 될 수 없을까.’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책이 있을까 싶어 서점을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근처 카페에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꼭 책에서만 답을 찾을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나는 왜 네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우선, 같은 배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다른 게 현실이다. 그것이 쌍둥이일지라도 말이다. A부터 Z까지를 경우의 수로 보았을 때, 하나만 다르더라도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알파벳이나 숫자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생물이 아니다(내가 MBTI를 그리 믿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그렇기에 이 복잡한 생물은 절대 동일체가 될 수 없다. 물론 간혹 하나가 된 듯한 착각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의 민족성을 공유한다. 민족은 고유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생활양식이나 문화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너와 나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기준이 된다. 이처럼 인간은 때로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너와 내가 완전하게 같아지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나는 아니라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성은 그저 생존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기에 너와 내가 함께 하지 않으면 외부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함이라지만 너와 내가 한편이 되는 것에는 마땅한 명분이 필요하다. 나는 이 명분이 민족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생각은 같고, 그래서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공통된 위협이 맞다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명분. 때문에 민족성은 그저 수단일 뿐이다.
암울해 보일 수 있는 결론이지만,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보이게 하는 수많은 장치들이 존재할 뿐. 하지만 나는 이것이 인류를 위한 최소한의 ‘안정장치’라고 생각한다. 너무 낙담하는 이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내가 너가 되어버린다면 개별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하나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한 세상에 누군가 군림을 하게 된다면 그자는 자신의 사회에서 예외가 생기지 않게 철저한 통제를 할 것이다. 절대적인 가치관만이 존재하게 되고, 그것에 벗어나는 이들은 사회에서 격리되고 낙오된다. 히틀러가 민족의 우월과 열등을 근거로 유대인을 학살했듯, <화씨 451>에서 국가가 나서 책을 태우고, 매번 같은 영상을 방송으로 송출하듯 말이다. 그야말로 두 눈을 질끈 감게 되는 상상이 아닌가.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그렇게 되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끔찍한 상황을 나열해 보았다. 하지만 절대 좌절할 필요가 없다. 나는 네가 될 수 없지만, 우리는 서로 수렴할 수 있다. 나의 일부를 너에게 주고 너의 일부를 내가 취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거래의 개념이 아닌, 절대적으로 같아질 수 없는 현실에서 인간이 선택한 아름다운 생존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