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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ul 07. 2021

동네의 점과 면

호찌민은 락다운

얼마 전에 팟캐스트를 듣는데 '동네를 점으로 사는' 사람들 얘기가 나왔다.


철옹성 같은 큰 담이 둘러진 곳에 살면서 주차장과 주차장으로만 연결된 동선을 자동차로만 이동하며 다니는 사람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백화점의 주차장으로, 혹은 마트 주차장으로 혹은 회사의 주차장으로... 그럴 경우 주변 환경을 점과 점으로 인식하게 되고 그 이외의 공간에 대해서는 무지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건축이란 건축물과 그 주변 환경 및 공동체를 아우르는 것인데 건축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점과 선으로만 이어지는 동선은 아쉽다는 얘기였다.


그걸 듣고 나니 뭔가 알 것 같았다. 나도 아침저녁으로 집 주변을 걸은 이후부터 우리 마을이 정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굳이 치장해 보자면 코로나 시대의 락다운이 준 선물이랄까. 수영장과 짐이 닫히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땡볕 아래를 걸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다. 그 사람들 중에 나도 있다.


걷다 보면 그동안 자동차로만 다니면서 무엇을 놓쳤었는지 알게 된다. 내 다니던 거리를 한 발자국 단위로 다시 살피게 된다. 어느 꽃이 어느 구석에 피었는지를 살피게 되고(상대적으로 노란색 꽃이 많다), 지난번에 개똥을 보았던 자리도 다시 한번 본다. 꽃향기가 나면 무심결에 두리번거리며 어떤 꽃이 이렇게 사방을 즐겁게 하는지 찾아본다. (아카시아였다.) 유난히 거리가 깨끗한 날은 청소 공무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생긴다. 종종 쥐의 사체, 개구리의 사체, 무참히 부서진 달팽이의 사체도 본다. 다행히 내가 발견했을 때에는 뙤약볕에 많이 건조된 상태이다. 그 마저도 처음 보았을 때에는 악악 거렸는데 이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자연으로 돌아갈 텐데 뭐.


무엇보다도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이 큰 기쁨이다. 그들에게도 루틴이 있어서 일정한 시간에 나가 걸으면 같은 사람과 같은 개를 만나 얼굴을 익히게 된다. 개와 함께 뛰는 조거들도 있다. 어느 날은 어미 개와 세 마리의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가족을 만났다. 어미가 시바견이었는데 시바견의 강아지들이 신음 나오게 귀여운 생명체들이란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 집의 아이들이 각각의  털 뭉치들을 품에 안고 길을 나서는 걸 보고서는 나도 같이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잠시라도 내려놓는 순간, 공처럼 사방으로 튈 게 틀림없으니 꼬마들이 털 뭉치들을 잘 붙들고 다니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걸어보면 나랑 관련 없는 것들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된다.


개와 산책하는 사람 중에 개는 같은데 동반자가 매번 바뀌는 남자가 있다. 남자는 항상 위아래를 검은색으로 입고 있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밀짚으로 된 페도라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다. 한 번은 키가 큰 늘씬한 모델 같은 여자와 나와 있는 걸 봤는데 어느 날은 조그만 체구에 귀여운 인상의 여자와 개 산책을 하더라. 또 다른 날은 동반자가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텐데, 그 사정이란 게 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관심이 무례한 오지랖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아침 7시에서 8시 사이에 근처 공원에 나가면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매일처럼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서양 사람인 걸 보니 관공서에서 나온 건 아닐 텐데 밀짚모자를 쓰고 쓰레기를 담을 자루까지 들고 나와 참 열심이다. 매일 같이 보게 되니 말도 트게 된다. 집에 있는 게 지루해서 나온단다. 은퇴하고 집에 있으면 나 같아도 뭐든 찾아 하게 될 것 같다. 얼마나 지루할까. 길의 쓰레기를 줍는 일은 나도 한 번 해 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여기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있으니 내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덜고 감사함을 더한다.


한 달 전에 자전거를 마련했다. 락다운의 반작용으로 자전거 타는 인구가 급증했고 나도 거기에 동참했다. 걷고 뛰기만 하는 루틴에 확실한 즐거움이 더해졌다. 일단 걷는 것보다 더 멀리 나가게 됐다. 항상 걷던 곳의 10Km 반경을 벗어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가보지 않았던 동네도 찾아가 보게 된다. 이렇게 가까이에 이런 좋은 풍광이 있었어?? 새삼 놀라게 된다. 아침 햇살을 즐기는 버펄로와 오리들이 유유히 어울리는 물가에 앉아서 잠깐의 휴식을 즐기고 다시 돌아온다. 걷기만 했다면 오지 않았을 동네였다.


내가 사는 동네를 최대치로 즐기는 방법은 걷기 만한 게 없다. 걷고 뛰다가 지치면 자전거도 좋다. 호찌민의 햇살이 무서우면 아침 6시에 나가면 된다. 생각보다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놀라게 된다. 아마도 그때의 기온이 하루 중 가장 쾌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동네를 3D로, 4D로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숨이 가쁘게 달린다. 땀에 함빡 젖은 상태로 아드레날린의 충만한 세례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도시의 행정이, 행태가 이가 갈리게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물론 있다. 지금 이곳 호찌민은 음식점, 백화점, 쇼핑몰 모든 곳이 닫혔고 택시도 다니지 못한다.  번씩 욕지기가 나오지만. 하지만 어딘들. 어딘들 꿈처럼 아름답기만 하겠는가. 그건 그것대로 내버려 두고 (어차피 이를 간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즐거움을 찾는다. 바이러스 무섭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앉아서 신세 한탄만  수는 없다. 마스크로 무장하고 내일도 나가기 위해 알람은 5.30으로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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