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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Feb 15. 2022

안녕을 원한다

Happy New Year

2022년은 지난해와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생각이 새해에 들었더랬다. 'Happ new year!'를 외치는 것이 기만이라고 느껴져서 그냥, '.... new year!'라고만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중등과 고등학교는 몇 달 전에 대면 수업을 시작했지만 유치와 초등은 여전히 온라인 수업 중이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10개월째였다. 10개월이라고? 온라인을? 길고도 길었다. 내 주변의 학부모들은 '내가 미쳐가는 게 느껴져요.'라고 누가 얘기를 꺼내면 '저도요, 저도요'라면서 서로를 위안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2월 14일부터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일시에 대면 수업을 시작했다. 그게 어제다. 설마 설마 하며 기다렸는데 소문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걸 소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호찌민시의 인민위원회 건 교육청이건 대면 수업에 대한 그 어떠한 공지도 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알음알음(그 경로를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으로 대면 수업이 시작될 거라는 소식을 서로에게 전했다. 각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에게 대면 수업을 알리는 메일을 보냈지만 항상 '이변이 없는 한'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동안 사실은 좀 궁금했다. 식당이고 술집이고 마사지 샵이고 어떠한 제재도 없이 다 정상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오직 학교만 굳게 닫혀 있었던 것이다. 그건 어떤 논리에 근거한 정책이었던 것인지 나는 정말 정말 궁금했었다.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은 채로 학교는 갑자기 문을 열었다.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는 감기처럼 여기고 껴안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대세가 된 듯하다. 바이러스로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었다는 사돈의 팔촌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고 싶은 눈치다. 물론 여전히 코로나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나도 코로나로 앓아누웠었다.) 독감 환자나 장염 환자나 눈병 환자처럼 말이다. 어쩌겠나. 앓고 말아야지.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학교가 대면 수업을 시작하자 기분이 째진다. 마침내 이 지난한 팬데믹의 악몽이 끝나는 것인가 싶어서 갑자기 희망에 부풀어 오른다. 베트남 정부는 현재 여행 비자를 발급하지 않고 있는데 왠지 그도 곧 내줄 것 같은 분위기이다. (하지만 7월에서야 가능해질 거라는 우울한 예측도 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현재 3일간의 자가격리를 하도록 되어있는데 3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곧 그마저도 풀리지 않겠냐고들 수군거린다. 


자가격리가 없어지면 어디부터 가겠냐는 것이 대화거리가 된다. 아무래도 한국부터 가보지 않겠나. 정확히 2년 동안 가지 못했다. 엄마를 봐야 한다.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아닌데 페이스 톡을 할 때마다 엄마가 조금씩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인다. 같이 늙어가는 마당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날이 새털같이 많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일 순위다. 이 순위는 한식이다. 간장게장, 곱창구이, 곱창전골, 순댓국, 홍어삼합 등등.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막상 먹고 나면 별게 아닐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간절히 뭔가를 바라고 있는 상황이 주는 쫄깃함이 있다. 바라는 게 없으면 죽은 거나 다름없지 뭐. 그런 생각도 한다. 


한국 다음으로 가고 싶은 곳이야 쎄고 쎘다. 입이 떡 벌어지게 위대한 자연경관이 있는 곳을 찾아가고 싶다. 베트남은 바다가 있지만 산은 보기 힘든 데다 있어도 귀여운 수준이다. 모든 것이 대체로 아기자기하다.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경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내가 이런 얘길 하면 '사파'라는 곳을 가보라고 하던데 아직 같이 갈 동무를 찾지 못해 망설이고 있다. 여하간 그랜드 캐니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설악산 울산바위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 


안녕을 원한다. 그게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다. 포스트 펜대믹의 안녕이라는 것은 아마 그 이전의 안녕과는 다른 모양일 테지. 기준이 필요하다. 적어도 엄마를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면 그게 안녕인 걸까? 오고 가는 것에 자유가 생기면 그것이 안녕인가? 같은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재채기하는 사람을 피하지 않고 진심으로 'bless you'를 할 수 있으면? 


우리 모두가 안녕한 2022년이 되었으면 하고 이제야 바라고 있다. 뒤늦은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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