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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Feb 19. 2022

죽음을 생각하는 돼지

샬롯의 거미줄

윌버는 봄에 태어난 아기 돼지예요. 세상 불편한 것 없이 돼지우리 안에서 맛있는 꿀꿀이 죽을 먹으며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친구가 없다는 게 흠이었는데 어느 날 샬롯이라는 거미를 알게 되고 진한 우정을 나누게 돼요. 부러울 것이 없었던 윌버는 어느 날, 자신이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베이컨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쩐지 매일 때가 되면 여물통이 맛난 것들로 채워진다 했지요. 그 바람에 살이 야무지게 오른 핑크 돼지가 되었고요. 윌버는 이 사실에 너무 놀라 울며 몸부림을 칩니다.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라며 온 우리를 헤집고 다니는데 다른 동물들은 시끄럽다며 핀잔을 주죠. 그 와중에 윌버의 진실한 친구 샬롯은 '내가 구해 줄 테니 진정해. 너는 죽지 않아. 걱정하지 말고 자렴.'라고 하면서 윌버를 위로합니다. 윌버는 금세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잘 자게 됩니다. 하지만 새벽에 잠을 깨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몸서리를 칩니다. 낮에는 죽음을 잊고 놀지만 밤이 되면 어두움 속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돼지가 된 것이지요. 


<Charlotte's Web>이라는 아이들 읽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뉴베리 수상작인 데다 영화로도 만들어졌고요. 그래서 항상 초등 필독서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책입니다. 1980년도에 초판이 인쇄됐으니 40년이 넘게 널리 읽혀온 셈입니다. 


여차 저차의 이유로 일 년에 한 번씩 읽어서 최근에 세 번째 반복해서 이 책을 읽었는데요. 전에는 윌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돼지고기를 덜 먹어야 하는 걸까 하는 얄팍한 생각만을 하고 넘어갔습니다. 윌버가 사실은 우리가 먹는 삼겹살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완전히 달랐어요. 낮에는 놀기 바쁘지만 밤이 되어 눈을 감으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윌버가 누구랑 닮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누구랑 닮았는지 금세 알았죠. 저 역시 낮에는 부러 잊으려고 바쁜 척 하지만 밤이 되어 눈을 감으면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사실 구체적인 생각을 할 수는 없어요. 워낙 죽음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요. '죽기 싫다, 죽기 싫어! 나는 이 돼지우리에서 계속 친구들과 살고 싶어.'라고 외치는 윌버와 별로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합니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 죽기 싫다. 내가 완전히 사라지는 세상이라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집니다. 너무 무섭고 외롭기 때문이지요. 윌버 역시 그럴 때 '샬롯? 샬롯?' 하며 자고 있는 거미를 깨웁니다. 진실한 친구 샬롯은 매번 대답을 해 줍니다. 정말 훌륭한 친구예요. 제게도 그런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공교롭게도 그런 친구가 없고, 남편은 아마 밤중에 깨우면 겁나 짜증을 낼 거예요. 고양이 두 마리가 같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제가 부를 때 듣는 시늉도 안 한답니다.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죽음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윌버와 닮았지만 샬롯 같은 친구가 없다는 점에서는 윌버와 다릅니다. 


주인이 주는 꿀꿀이 죽을 배가 터지게 먹다가 크리스마스가 되면 정찬이 되어 식탁에 오르는 윌버의 인생과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게임 속에서 정해진 역할로 소모되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저의 인생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서 말했듯 큰 차이는 그 역할 안에서 슬픔과 기쁨을 함께할 진정한 친구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구별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비슷한 삶을 살다가 비슷한 경로로 이 별을 떠날 테니까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제 부모 형제와 친하게 지내질 못하고 있어요. 애틋한 관계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직계 가족 남자들과는(부친과 남동생) 성인이 된 이후에도 번번이 부딪쳐 최대한 멀리 지내고 있고요 엄마와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친구처럼 살갑진 못해요. 남동생이 아들 셋을 낳는 바람에 엄마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기 바쁘거든요.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지만 제가 어둠 속에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알턱이 없고 말을 꺼내는 순간 저를 피할 거예요. 워낙 진지한 대화에 알레르기가 있는 종족 군이거든요. 


제 친구들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20대 때 가장 친했던 친구와는 그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이후로 멀어졌어요. 그즈음의 인연에서 한 두 명 정도는 여전히 카톡으로 연락 정도는 하고 있지요. 가까이 살았으면 나았을까요? 해외에 나와서 살다 보니 생각을 온전히 나누기가 어려워요. 나머지는 모두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에요. 오래 동안 일을 하면서 친했던 사람들도 일로 관계가 틀어지니 원수가 되기도 했어요. 내용증명이니 고소니 하는 말들 속에서 인연이 완전히 끊어졌죠. 참 아쉬운 대목이에요. 어른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체념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데 직원들은 사장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으니 새로운 친구를 만들 일은 더 요원해졌어요. 


저는 윌버처럼 진정한 친구를 만나게 될까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친구 말이에요. 서로의 내면을 깊이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친구 말입니다. 보험 얘기, 시댁 얘기, 자식 얘기도 나쁘지 않지만요 윌버와 샬롯처럼 어둠 속에서 죽음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아요. 그건 지나친 망상일까요? 그런 관계는 책에만 존재하는 걸까요? 이걸 읽는 누군가는 그런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럽기 그지없네요. 


그나저나 우리 엄마도 비슷한 얘길 했어요.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필요 없고 늙어서 남는 건 친구밖에 없다던데요. 긴가 민가 했는데 엄마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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