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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각두건 Oct 07. 2023

혼자 보내는 밤

한없이 깊은 우물 같았던

브런치북을 완성해 발간한 이후로

나의 정신건강은 기쁘게도 상승세였다.


애인과의 관계가 자리 잡혀 드디어 나도 흔쾌히 가족이 되기로 했음은 물론이고-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므로 이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 기회가 된다면 하도록 하겠다.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 레즈비언 커플이 법적 가족을 맺기란!-

하루 세 번 30개를 먹던 정신과 약이 이제는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의 잠을 불러와 25여 개로 줄었고-드디어! 내 담당 전문의 선생님은 부작용이 생기기 전까진 약을 줄이지 않는 치료 방식을 사용하신다. 말인즉슨, 선생님의 오랜 임상 경험 상 부작용이 없는데도 약을 줄이면 늘 시기가 이르더라는 것이었다. 부작용이 있다는 것은 처방되는 정신과 약물의 양이 많거나 적거나, 종류가 환자에게 맞지 않다는 것. 잘 먹던 약을 줄이려면 증상이 호전될 때가 아닌, 증상 호전을 넘어 부작용이 나올 만큼 약물의 효과가 환자에게 넘쳐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치료 방식은 내게 잘 맞다. 아직까진.-

이제는 매주 가는 상담에서 죽고 싶다는 얘기 대신 직장 상사 욕을 한다. 그만큼 일상에서 느끼는 고통이 줄었다.


여전히 감정 기복이 롤러코스터를 뺨치고 날아가 사지가 덜덜 떨릴 만큼 울다가 갑자기 야식으로 라면을 끓이며 기분 좋아하는 나지만, 나의 우울증 호전을 새삼의 순간에 또렷이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과 같은 순간이다.

약간의 과한 정보를 더하자면 위에 서술된 감정기복은 바로 몇 시간 전, 그러니까 오늘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야식을 배불리 먹고 새벽 3시가 가까운 시점까지 못 자고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길고 긴 밤에 내 애인은 함께하지 않는다. 지금 도롱도롱 코를 골며 귀엽게 잠들어 있다.


고작 몇 달, 몇 주 전의 나는 밤에 절대 홀로 깨어있지 않았다. 그러려 했다. 호기롭게 마주한 몇 번의 밤마다 머리통을 스스로 깨거나 팔을 긋거나 사시미 칼을 들고 거울 앞에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우울장애가 뚜렷이 발현한 후 긴 밤에 홀로 깨어 있는 것은 거의 백발백중 내게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애인과 함께 잠들고, 수면제가 포함된 약들을 삼키고, 애써 마주하지 않았다. 거대한 뱀의 끝없이 캄캄한 목구멍 같은 이 밤을.

곤히 자는 애인을 깨우는 일은 중죄와 같은 죄책감을 내게 얹어주기에, 나는 종종 자살예방 긴급전화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 너머 상담사분이 좋은 말을 해주시든, 달래주시든, 침착하시든, 운나쁘게 잘못 걸려 헛소리를 왕창 듣든 간에 모든 분들이 적어도 그 밤을 살게는 해주셨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겠지. 이 자리를 빌려 1393 긴급전화에서 24시간 근무하시는 모든 상담사님들께 감사인사를 드린다.


여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밤을 혼자 별 헤지 못할 줄 알았다. 별을 세다 꼴까닥 숨 넘어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오늘, 야식을 해치우기 전 손발이 후들거릴 정도로 울었고 하루종일 두통이 심했으며 직장 스트레스가 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밤을 잘 보내고 있다. 잘 보내다 못해 책 한 권을 독파했고 서가의 다른 책들을 탐험했으며 브런치에 글까지 쓰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얘기들은 모두 오늘 내가 이 밤을 성공적으로 혼자 보내고 있는 것에 대한 찬사이자 응원이다. 잘한다, 나 자신!


솔직히 브런치북 '우울증을 가진 전문상담사로 살기'를 처음 쓰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우울증이 이 정도까지 좋아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미래'라고 하면, 바로 한 발 앞이 그랜드캐년의 낭떠러지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미래를 그려볼까 하면, 애인이 보이고 행복하게 웃는 내가 있다. 반려묘가 있을 수도, 입양한 자녀가 있을 수도, 자가가 있을 수도 있겠다. 나름 낭만적이고도 현실적인 꿈을 그릴 수 있게 됐다. 놀랍게도!


다시 글을 쓴다면 기쁜 소식으로 쓰고 싶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니까. 그런데 이 꿈이 이루어지다니. 한없는 기쁨의 박수와 환호를 나 자신에게 보내며, 나도 이제 그만 소리 없이 잠들어야겠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하루가 있으니까.


오늘의 글은 애인과 내가 매일 밤 꼭 나누는 인사로 마무리하겠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고 살아줘서 고마워.
내일도 우리 같이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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