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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From Soph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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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in Jun 05. 2020

From_ Sophie

in 2010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마음 한 켠에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고 하는데, 그해 여름 나의 그것을 부채질 한 이는 다름 아닌 나의 어머니였다. 여행사의 배낭여행 프로그램을 구매하고, 딸을 혼자서 타지로 밀어 넣는 일을 그녀는 저녁메뉴를 결정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행동으로 옮겼다. 그 무렵 그녀는 입버릇처럼 ‘살아보지도 못하고 60이다.’라는 말을 달고 계셨다. 


 대학교 2학년 방학을 앞둔 여름, 시험 준비로 분주하던 나에게 그녀는 A4용지 여러 장이 분철된 문서 꾸러미를 내밀었다. 첫 장은 한국에서 체코의 프라하로, 그리고 그로부터 3주 후 영국의 런던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 나란히 적힌 비행기 티켓이었다. 해외 배낭여행에 대한 로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권도 없었던 나에게 3주간의 유럽여행을 시작하는 마음은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과제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가까웠다. 여행사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여권을 만들고 환전을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 하나 고민할 것 없이 담당자가 예약해 놓은 숙소에서 묵고, 예약된 시간에 기차나 버스를 타고, 추천하는 장소를 관광한 뒤, 꼭 먹어야할 음식을 먹는 식이었다. 대학생들의 여행이 으레 그렇듯,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그 여행 상품의 목표인 듯 보였다. 혼자서 스케줄을 수행한다는 점만 빼면, 가이드가 동반하는 패키지여행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체코와 헝가리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지나 크로아티아에 도착해서야 2주가 가까운 시간동안 단 하루도 5시간 이상 푹 자본 적도, 그렇다고 거리에 앉아 멍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원에 앉아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론 다음 장소를 가늠했다. 여행하는 동안 눈과 피부색이 다른 유럽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생경하고 즐거웠을 법도 한데, 낮에는 짜여진 스케줄을 수행하고 밤에는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배낭여행객들과 의무에 가까운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는 일로 시간을 채우느라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조차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한 타인에 대한 경계로 위축되어 한치 앞의 미래만 보고 따라가는 식이였다. 


 그런 나를 변화시킨 것은 커다란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나는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있었다. 새벽녘 잠에서 깨어 아무도 없는 공원을 산책하다가 풀밭에 막 앉은 참이었다. 옥색으로 빛나는 호수에 물안개가 피어나고 불어난 물로 인해 벤치가 물에 잠겨 인도와 호수의 경계가 모호한 길, 그 위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에서 햇빛이 아래로 드문드문 떨어지고 있었다. 오리들이 유영하며 만들어내는 물결이 내 발치까지 밀려 왔다가 저들끼리 부딪혀 부서지듯 사라져갔다. 그것을 나는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덕분에 신발이 진흙으로 엉망이 되고 입고 있던 우비 안으로 비가 스며들어 축축한 와중에 불현 듯 ‘이 순간 이곳에서 내가 분명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생에 처음이었다.


 그동안 아무도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쏟아지는 과제와 쪽지시험, 그리고 그것들을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놀기보다 도서관에 머무는 쪽을 택하던 나였다. 그리고 그 매사에 열심히 하던 버릇이 관성으로 남아 아무도 강요한 적 없음에도 온전히 나의 의지에만 맡겨진 여행에 조차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목적 없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여행사가 추천하는 장소를 다 돌아보고, 남들이 다 먹는다는 음식을 다 먹고 나서야 안도감을 느꼈다. 그 사이 점점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겨를이 나에겐 없었다. 


 나의 어머니가 며칠 밤을 새며 시험 준비를 하느라 벅찬 나에게 왜 해외로의 여행을 강요하듯 등 떠미셨는지 알 것 같았다. ‘살아보지도 못하고 60이다.’라는 말은 곧 ‘60년 평생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자각할 틈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수능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그 길로 생계와 육아에 자신의 인생을 모두 할애하셨다. 자식이 셋이면 선녀의 날개옷도 무용지물이라는 우화처럼 그녀는 동네에서 공부로 꽤나 이름 날리던 젊은 시절 품었던 밝은 미래를 하나하나를 접고, 자기 이름 석 자로 사는 것을 가족을 위해 점점 내려 놓으셨다. 어렴풋한 기억에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무렵까지 여전히 그녀는 마음 한곳에 그녀의 딸인 나와 함께 대학에 입학해 경영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곤 하셨다. 고등학생 때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내 뒤에서 가만히 앉아 책을 읽으시거나 일기를 쓰시던 모습마저 이렇게 생생한데 언제 그 작은 소망마저 품기를 그만두셨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딸마저 한치 앞만 보느라 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각하지도 못 한 채 떠밀려 가는 것을 보고 계실 수만은 없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스무 살이 막 지난 인생의 한 시점에서 쉼표를 찍고, 자신의 인생을 가만히 지켜볼 여유를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크로아티아의 한 국립공원에 홀로앉아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그 순간을 온전하게 누렸다. 


 오감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눈으로는 비온 뒤 맑게 빛나는 호수와 녹음을 바라보며 물빛이 초록에서 파랑, 그리고 그 사이의 수많은 스펙트럼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맑은 물은 어쩌면 파랑보다는 초록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양 귀를 뚫고 폭포수의 소리가 쏟아져 들어오고 흙 내음이 베 있는 찬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며 안에서 밖으로 흘러갔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울음소리는 울림이 되어 산 전체를 가득 메웠다. 잔잔하던 물가에 동심원이 생기면, 저 깊은 곳 어딘가에 호수가 품고 있을 작은 생명들을 상상했다. 십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도 ‘조화’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나는 항상 그 순간 플리트비체의 호숫가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나는 태초부터 함께 있었던 양 존재하고 있었다.  


 그날이후 나는 스케줄을 따라 여행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장기간의 비행을 거쳐 유럽으로 왔지만, 여행 책자가 제안하는 ‘하루 만에 한 도시 정복하기’ 대신에 내 손에 넘쳐흐르는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쪽을 택했다. 요트 세일링이 유명한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서는 길거리에 하루 종일 앉아 노래하는 악공들을 배경으로 아드리아의 붉은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남들이 다 자는 새벽녘 숙소 밖으로 나와 지구 반대편에서 타인들의 하루가 시작하는 모습을 마치 관객이 된 양 지켜보았다. 그들의 시간의 흐름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것뿐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내 몫은 충분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맛 집들을 지나쳐 재래시장에서 산 사과를 베어 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런던에서는 빅벤과 런던아이의 야경을 보는 대신, 템즈강을 따라 지하철역들을 스치며 지칠 때 까지 걸었다. 

구름 낀 하늘에 반사된 타워 브릿지의 조명이 만들어낸 야경은 십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원하는 순간 마음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걷다가 우연히 조지 오웰이 살았던 집이나 영화 노팅힐의 배경이 되었던 서점을 만났을 때, 내가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의 접점이 만들어낸 선물과도 같은 순간을 또렷하게 자각했다. “내가 지금 이 곳에 존재하고 있다.”고.


  혹자들은 홀로 여행을 하며 자신이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인지 깨닫고 돌아온다고 하던데, 나에게 그 시간들이 알려준 것은 ‘나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빛난다.’는 것이었다. 생은 애초부터 나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으며 부단한 나의 노력에 대답하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다채로운 것들을 늘어놓고 그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몫은 온전히 나의 것으로 남겨놓았다.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긴 인생을 놓고 보았을 때 찰나에 가까운 그 며칠의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전과는 다른 눈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하나 변한 것이 없었지만 작은 것들에 애정을 느끼거나 사소한 것들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인생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첫 여행이 일으킨 파고가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뉴질랜드의 웰링턴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머니가 내 마음속 ‘먼 곳에의 그리움’에 불씨를 당긴 후 그동안 적지 않은 여행을 다녔지만 그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나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한 떠남이 아니었다. 그저 즐거움을 위한 것 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생이 조금 더 충만하기를 바랐고 새로운 경험들로 빛나기를 원했다. 그뿐이었다. 계절이 반대로 흐르는 뉴질랜드의 한 카페에 앉아 겨울의 서울을 상상하는 일은 요즘 나를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다. 꽤 오랜 일정으로 이곳으로 떠나왔지만 영어로 소통하는 다른 문화 속에서 살면서도 방으로 돌아와 모국어로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행복을 느끼는 것에서 내 본연의 모습을 확인한다. 인생을 충만하게 하는 일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며 온전히 자신에게만 주어진 의무이자 특권이다. 그리고 나는 생에 대한 의무를 잘 해내고 싶고, 특권을 오롯이 누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맹목적인 여행 예찬론자는 아니다. 여행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또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이 소모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한번쯤은 일상에 쉼표를 찍고, 짧지 않은 여행을 떠나봄직 하다고 당신을 부추기고 싶다. 텃밭이 아니라 정원을 가꾸듯 우리의 인생을 가꾸자고, 먼 훗날 돌아보았을 때 다채로운 꽃들로 빛나는 생을 갖기 위해 얼마간의 투자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이다. 





From_ Sophie

060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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