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단식광대>와 한강의 <채식주의자>
현대 사회에서 ‘굶주림’은 동떨어진 단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과거 빈번한 전쟁 등으로 굶주렸던 우리 사회는 빠른 발전을 거듭하며 이제 풍부한 식량 자원을 확보하고 있다. 오히려 과도한 섭취로부터의 건강 문제가 발생할 정도로, 이제 ‘먹는다’라는 행위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에 따라 자연히 굶주림은 나와 멀리 떨어진 일인 듯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다음의 두 문학작품으로부터 다양한 굶주림의 형태와 현대인의 굶주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고, 굶주림이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식광대>와 <채식주의자>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단식광대 Ein Hungerkünstler>에는 단식 공연으로 인기를 끌다 더는 관객이 찾지 않는 한 단식광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작품에는 단식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그의 모습과 이후 다른 공연에 눈을 돌린 관객들, 그리고 여전히 단식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 모두를 다룬다. 이 글에서는 작품 속 단식 공연이 의미하는 바와 끝까지 단식을 이어가다 생을 마감하는 단식광대로부터의 메시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굶어 죽음에 관한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 <단식광대>와 마찬가지로, 굶주림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담긴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꿈을 꾼 이후로 육식을 거부하며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여성 주인공의 삶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채식과 굶주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와 더불어 두 작품에서 공통으로 드러난 주변인들이 '음식을 억지로 먹이려는 행위'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현대의 독특한 굶주림의 형태인 거식증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이는 우리 주변의 굶주림과 그 위험성을 인식하게 해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 굶주림의 의미
두 작품에 나타난 굶주림은 서로 다른 면이 있지만, 동시에 공통점도 존재한다. 공통점을 다루기 전, 특히 <단식광대>에 드러난 굶주림을 살펴보자면, 이 작품에서 단식광대의 단식, 굶주림은 예술과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작품에서도 단식이 하나의 공연 형태로 묘사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단식광대의 단식은 <채식주의자>의 굶주림과는 달리 예술성을 지닌다. 40일간의 단식 광대의 단식은 긴 쇼의 형태이며, 관객들은 단식을 진행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40일이 되었을 때 앙상하고 어찌 보면 종교적으로 숭고한 그를 예술 작품처럼 바라본다. 그래선지 단식 광대가 거짓 없이 단식해 내려는 모습으로부터 그의 예술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도 있다. 따라서 <단식광대>에서는 굶주림이 예술적 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두 작품에 나타난 공통점은 ‘자발적인 굶주림’이다. 단식광대는 자신의 감시자들이 아주 풍족한 식사를 할 정도로 음식이 풍부한 장소에서 단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맞는 음식이 없다’라는 이유로 단식을 계속하다 결국 죽는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 또한 형편이 어려워 음식을 구할 수 없다는 등의 묘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꿈을 꾸게 되면서 스스로 육식을 거부하게 된다. 주변의 환경이 그들을 굶주리게 한 것이 아니라, 굶주림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현대인들이 생각해보아야 할 굶주림의 문제는 더 이상 원초적인 의미의 굶주림이 아니다. 바로 이 ‘자발적인 굶주림’의 문제이다. 자신에게 충분한 먹을거리가 주어졌음에도 스스로 굶주림을 선택하는 것.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프로아나’라고 불리는 거식증에 찬성하는 우리 사회의 사람들을 보더라도, 현대에서의 굶주림이란 풍족한 음식을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가 먹는 것을 거부하고 굶주림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도움은 전혀 의미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굶주림의 비유: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행위와 함께
두 작품에서 등장하는 굶주림의 형태는 이렇듯 현대의 기이한 자발적 굶주림의 형태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비유적 표현으로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채식주의자>에서도 언급되었듯, 우리는 우리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우리 방식으로 규정하여 안정감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채식에 ‘주의’라는 개념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강력한 신념을 지녔기 때문에 이런 비상식적인 일을 하는 것이라 여기는 것으로부터 이 말이 시작된 것이다.
두 작품에서도 단식과 채식을 통한 굶주림은 주변인들의 ‘걱정’으로 포장된, 자신들의 안정감을 위한 강압적 규제를 받는다. <단식광대>에서 40일의 단식기간이 끝나면 단식 광대가 원치 않아도 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행위나,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입을 벌려 가족들이 억지로 음식을 집어넣으려는 장면을 통해 강압적으로 주변인들이 굶주리는 사람에게 음식을 먹이려는 행위가 등장한다. 그들은 이 행위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즉 그들을 위한 행위라 여기지만, 당사자들에게 전혀 그렇지 않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고방식과 행위의 양식이 존재하나, 사람들은 각자의 사고 회로 내에서 이해될 수 있도록 타인의 행위를 규정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수정해주고 싶어 한다. 한국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경우이다. 명문 대학에 진학해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가장 성공한 삶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를 그렇게 키우려 하다 벼랑 끝까지 몰아가는 경우 같은 것들 말이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채식이 병적으로 보이긴 하나, 그 누구도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영혜가 결정한 자신의 철학을 바꾸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빈번히 일어나는 일들처럼 이 작품 속에서 영혜의 가족들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그녀를 수정하려 하고, 결국 영혜는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된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벼랑 끝에 서게 된 아이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단식광대>에서도 자신의 신념,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단식광대의 단식을 의심 없이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뿐이다. 관객들, 심지어 그의 단식을 계속 지켜보는 감시자들 또한 그의 단식을 의심한다. 자신들의 신념과 전혀 다른 것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40일째가 되었을 때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그를 수정한다. 두 문학작품은 이렇게 우리의 거짓된 행위를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새로운 형태의 단식, 거식증
두 작품을 통해 다뤄본 ‘굶주림’, ‘단식’과 같은 개념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문제, 거식증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때 SNS에서 화두에 오른 키워드 중에는 ‘프로아나’, ‘개말라’ 등이 있다. 프로아나는 찬성하다의 pro와 거식증 anorexia의 합성어로, 거식증을 찬성하거나 옹호, 동경하는 현상 및 그런 사람들을 의미한다. 개말라 역시 ‘매우’를 속되게 이르는 말인 ‘개’를 붙여 뼈만 남게 빼빼 마른 사람을 선호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키워드와 함께 올라온 게시글에는 갈비뼈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마른 몸, 뼈만 남은 앙상한 팔다리와 같은 사진들이 함께 올라온다. 게다가 그런 몸을 갖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공유한다. 그중에는 먹고 토한다는 뜻의 ‘먹토’, 폭식 후 토를 하는 ‘폭토’ 등 건강에 치명적인 급속 다이어트 방식이 대다수이다. 이런 프로아나는 10-20대 여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현상은 많은 젊은 여성에게 섭식 장애를 초래해 정상적인 생활을 어렵게 하고, 각종 정신 질환도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이 현상의 해결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해결책을 고민하면서, 앞에서 다룬 두 문학작품이 주는 시사점이 있다. 일단 가정 내에서 거식증을 앓거나 스스로 식사를 거부하며 굶주려가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강압적인 교정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믿음과 사고 내에서 일어 난 현상으로, 주변에서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흔히 ‘정상적’이라 불리는 생활로 돌아오게 하려는 시도는 의 영혜처럼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을 찾아내 그 와 관련한 주변 환경을 천천히 바꾸어 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왜 그들은 프로아나가 되었는가. 이 문제도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행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린 여성들이 마른 몸에 집착하며 건강을 해치는 원인에는 마른 몸이 아름답다는 인식의 강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작품에서 등장한 물리적으로 억지로 먹이는 행위와 같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은연중에 그들이 성장하는 배경 안에서 마른 여성이 아름답다는 음식을 억지로 그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인식을 하게 되진 않기 때문이다. 이를 살펴보더라도, <단식광대>와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굶주림이 현대 사회의 새로운 굶주림과 그 원인, 해결 방안에 있어 중요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짐을 알 수 있다.
마치며
단식을 하다 굶어 죽은 단식 광대와 꿈을 꾼 이후로 채식을 하다 병원에 들어가는 영혜라는 인물로 ‘굶는다’는 행위와 ‘그들은 왜 굶는가’, ‘우리 사회의 현대인들은 굶주려 있는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와 같은 여러 질문을 던지고, 깊게 생각해보게 한다. 또 굶주림을 비유적으로 생각하여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행위’와 같은 타인 규정, 교정의 문제도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이 문제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의 원인이 되어왔고, 또 그것을 해결함에 있어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임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문학은 때론 재미를 위한 것,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오락적인 요소 등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문학의 본질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 그리고 내면의 문제를 아주 깊게 생각해보게 하고, 때때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단식광대>와 <채식주의자> 또한 그 집필 연도의 틈이 매우 크지만, 현대인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