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1
단발 규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귀밑 3센티미터 이하로 잘라야 했던 중학교 시절 말고, 스스로 단발머리가 된 건 그 후로 20년이 지나서였다. 학창 시절엔 못 기르게 하니 오기가 생겨 무작정 긴 머리를 동경했고, 젊어서는 마음껏 긴 머리와 파마머리를 활용해 멋을 냈고, 애 엄마가 돼서는 묶기 편하다는 이유로 어정쩡한 긴 머리로 살았다. 그러다가 애 둘인 아줌마가 되고 보니 삼손의 긴 장발과 같던 머리카락을 그저 긴 눈썹이나 코털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없어서는 안 될 신체 일부지만 굳이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가꿀 필요까진 느끼지 못하게 됐다(단발머리가 더 자주 손질해줘야 하고, 꾸준히 파마와 관리가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알았지만 돌아가긴 너무 늦은 듯하다). 즉,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나 미적 열망이 사라지고 편하고 간단하고 손이 덜 가는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단발머리가 되었다. 한 뭉텅이씩 내게서 떨어져 나가 바닥에 뒹구는 머리카락들은 마치 포획된 짐승의 사체와 같았고, 나는 그것들로부터 해방된 일종의 자유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 가벼운 해방감과 짧은 자유에 중독 돼 2개월마다 꾸준히 자르고, 4개월마다 손쉬운 관리를 위한 파마를 하며, 어설픈 긴 머리 아줌마에서 짧은 머리 아줌마가 되었다.
바쁜 아침에 머리 감고 말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었고, 한여름엔 목덜미가 시원해서 좋았으며, 거추장스러운 게 하나라도 줄어서 좋았다. 내 몸에서 내 마음대로 줄일 수 있는 게 머리카락과 손톱뿐이라. 단발머리의 홀가분한 매력에 빠져 어쩐지 점점 짧아지는 게 염려되긴 하지만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
어렸을 때 동네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은 머리 스타일이 모두 비슷했다. 옷 스타일마저 비슷해서 뒷모습만 보고는 우리 엄마인지, 할머니인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동네 미용실 중 가장 값이 저렴한 곳을 많이 이용했기 때문이지만, 결국 집안일하기에 가장 편하고 손이 덜 가는 짧고 컬이 촘촘한 파마머리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우리 할머니의 머리 스타일이 그렇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4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똑같은 파마머리인데, 신기하게도 시골과 서울, 그 어느 곳에 살았어도 할머니의 파마머리는 변함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우리 엄마의 머리 스타일은 꽤 변화무쌍했다. 어린 기억 속 엄마는 자주 긴 머리를 높이 묶거나 앞머리에 잔뜩 굵은 컬을 말아 넣어 멋을 냈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긴 머리는 아니지만, 자주 미용실에 가서 염색이나 파마를 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한다. 그런 엄마의 짧은 파마머리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사진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 얼마 뒤, 머나먼 중동으로 일을 하러 떠난 아빠에게 보내기 위해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젊은 할머니와 더 젊은 엄마와 어린 나. 스물넷 아니면 스물다섯 밖에 되지 않았을 엄마는 옆에서 웃고 있는 할머니와 똑 닮은 파마머리를 한 채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두, 세 살 정도 됐을 어린 내가 마찬가지로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이 사진을 봤을 땐 젊은 엄마와 어린 내가 그저 신기했는데, 시간이 흘러 아이를 낳고, 이미 사진 속 엄마의 나이를 훌쩍 넘긴 나이가 되고 보니 묻지 않아도 사진 속 사연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긴 머리가 어울리던 멋쟁이 아가씨가 결혼을 하고 홀 시어머니를 모시며 신혼을 보내던 어느 날, 막달을 앞둔 새댁을 두고 새신랑은 머나먼 중동으로 돈을 벌어오겠다며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떠난 신랑은 비행기 푯값도 아껴야 한다며 지독하게도 4년 동안 한 번도 귀국하지 않았고, 그 사이 태어난 딸은 아빠의 얼굴조차 모른 채 무럭무럭 자랐으며, 긴 머리였던 새댁은 시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간 시골 동네 미용실에서 복사기로 찍어낸 듯 시어머니와 똑같은 머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진 속 엄마의 표정은 참 할 말이 많으나, 미처 다 할 수 없으니 입술이라도 내밀어야겠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귀국하고 약속대로 정말 큰돈을 벌어온 모양인지, 우리 가족은 분가해서 서울로 상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엄마는 다시 머리를 길게 기르고, 굵은 웨이브가 파도처럼 멋진 파마머리가 되었다.
내가 처음 단발머리를 했을 때, 엄마는 단발머리도 예쁘네 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엄마도 그때 알아차렸을 것이다. 꾸미기 좋아하던 당신의 딸이 자신보다 가족을 돌보는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