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7 pm 3:04
내가 남편과 결혼을 결심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추억을 곱씹어 아름답게 그리고 아련하게 희화화하는 현명하지 못한 나라는 걸 잘 알기에, 살면서 시간이 흐른 뒤 추억이 될 사람들 중 가장 잊지 못할 사람, 가장 아름답게 가장 아련하게 기억될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몇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놓쳤던 것들을 아쉬워하고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며 지나간 것들을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나는 결혼의 기로에서 특히 그 아쉬움과 그리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남편을 추억 속에서만 살게 할 자신이 없다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평생 그를 그리워하고 그와의 추억을 애태워하면서 기억만을 사랑하며 살 자신이 없었다.
가끔 남편한테 서운하고 속상할 때에는 나를 사랑한다 했던, 그 당시엔 나를 위해 모든 걸 다 해줄 것처럼 굴었던 몇몇의 남자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힘없이 공기 빠진 풍선처럼 시들어 버리곤 했지만, 남편이라면? 하는 생각이 내 발목을 잡았다. 이미 남편과의 추억은 빛바랜 사진처럼 몇 장이 겨우 남아있고 간절했던 마음은 일기 속에서나마 낯설게 느껴지듯 모든 게 현실화되어 버렸지만 누구를 만나 살든 결혼이란 제도와 부부라는 무촌의 관계가 증명하듯 현실은 삭막하고 냉혹할 터였다.
하지만 내가 만약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살았다면 매 순간마다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는 남편에 대한 기억과 순정의 추억에 짓눌려 숨조차 쉴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학 신입생과 복학생 선배로 만나 밴드 동아리 활동을 하며 거의 모든 걸 함께 했었다. 모든 게 새롭고 신났던 나와 그 모든 걸 지켜봐 준 남편은 그 자체로 청춘이었고, 추억이 되었다. 남편은 스무 살 어수룩하고 새파란 내 청춘의 한가운데 피어난 새빨간 장미와도 같았다. 졸업 후, 2년여 연애를 하고 2년여 함께 살다 보니 그게 빨간 장미였는지 노란 해바라기였는지 파란 수국이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둥글게 모여 앉아 술을 마실 때 소리 없이 깔려있던 잔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은 지금 나에게 그렇듯 추억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사람이 분명했다. 그러니 남편을 만나 함께 살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심장을 짓이기는 새빨간 장미의 가시에 찔릴 때마다 눈물을 삼켜야 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의 젊고 가장 멋진 모습을 기억해 주는 나와 그런 나의 순수하고 가장 예뻤던 모습을 기억해 주는 남편이 만나 함께 늙어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끔은 그 주름 진 얼굴 속에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내가 당신과 결혼 한 가장 큰 이유는 당신과 내가 함께 했던 추억 때문이에요,
라고 말한다면 남편은 서운해할까.
아마도 대수롭게 웃어넘기지 않을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