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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lie Dec 26. 2023

[하루] 취한 밤

2012. 9. 24 am 00:18

  아 취한다, 취해.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마시는 편도 아니었는데 임신과 출산을 겪는 동안 알코올을 전혀 입에 댈 수 없으니 사람의 묘한 심리가 부추기듯 가끔 시원하게 톡 쏘는 맥주가 한잔씩 당기곤 했다. 모유수유를 끊고 난 후 커피와 함께 찾게 된 맥주. 예전 주량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젠 시원한 수입맥주 한 병이면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알딸딸해지는 게 적당히 취한 기분이 된다. 그래서 오늘처럼 피곤하고 힘들었던 날 밤엔 딸아이를 재우고 맥주 한 병에 과자를 안주 삼아 하루를 위로하곤 한다.


  술보다는 기분에 취하는 밤.


  목구멍을 강하게 자극하며 위산을 분비시키는 느낌을 고스란히 느끼며 기포와 세포가 얽히고설켜 마침내 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공주의 눈물을 볼 것만 같은 밤.

  깊은 잠이 든 남편과 딸아이를 두고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레 집을 나와 맨발로 낯선 밤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발도 씻지 않고 지친 몸을 그들 사이에 뉘어 잠들고만 싶은 그런 은밀한 밤.

  하지만 때로는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치는 덫처럼 버겁게 느껴지는 이 현실이, 그럴수록 더욱 옥죄어오는 듯한 이 자리가 결국엔 내 종착역인 것을, 이곳을 벗어나서는, 남편과 딸아이가 없이는 나는 단 하루도 숨조차 내쉬며 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아득한 밤.


  여전히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꾸며 살지만 내게 이곳은 아무리 떠나도 저곳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게 되는 건지도.

  남편도, 딸아이도 언젠가는 가까워질 저곳을 꿈꾸며 그렇게 온 생을 이곳에서 살아가겠지. 각자의 저곳을 꿈꾸며 동상이몽을 하는, 그게 가족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복받치는 서글픔을 쏟아낼 따뜻한 가슴이 있으니, 서글픔을 못 이겨 흔들리는 어깨를 잡아주는 강인한 두 팔이 있으니, 나조차 감당할 수 없는 이 감정을 괜찮다고 말해주는 자상한 마음이 있으니, 그래, 그런 남편이 있고 내 목숨보다 소중한 딸아이가 있는데 이곳이 저곳이 아닌 들, 이 꿈이 그 꿈이 아닌 들,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들 무슨 상관있으랴.


  어쨌든 나는 취했고 이 밤이 이렇게 비틀거리며 내일로, 아침으로 향해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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