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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Oct 14. 2021

바이런의 와인과 헤밍웨이의 신발

알고 있지만 알지 못했던 세상


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을 붉히더라.


여기,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가 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에 대해 쓰는 시험에서 시인 바이런이 남긴 답변이다. 어쩌면 위 문장보다 조금 더 유명할 수 있는 문장을 한가지 더 들어보겠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아기 신발, 신은 적 없음.


친구들이 여섯 단어로 자신들을 울릴 수 있는 소설을 써보라며 농담삼아 던진 말에 헤밍웨이가 썼다는 소설이다. 헤밍웨이가 한 말이 아니라는 말도 있는데 누가 썼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설령 헤밍웨이가 직접 쓰지 않았다 해도 이렇게 훌륭한 문장이 그의 유명세를 타고 세상에, 특히 한국에까지 알려졌으니 우리에겐 그저 이득이다. 

한글로 번역해도 스무자가 채 되지 않는 두 문장 안에 기적이 담겨 있고 비애와 상처가 담겨 있다. 글자가 가진 힘과 권위가 있다. 




말이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살다 보면 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신비로운 기쁨의 순간이 찾아옵니다.하지만 적임자의 손, 천재 시인의 목소리를 빌린 말은 우리를 정확히 우리가 있고자 했던 그곳으로 데려다주기도 하지요. 시는 우리에게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여겼던 세상을 열어줍니다. <조니 톰슨, 필로소피랩>



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순간이 신비로운 기쁨의 순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삶이 주는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경험해본 사람이다. 인간을 숙연하게 만드는 자연 앞에 부족한 실력으로 끌어모은 단어와 글자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온몸에 스며드는 감동 앞에 덧붙인 미사여구는 초라한 겉치레일 뿐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그 역할을 대신해주는 소설가, 시인, 철학가가 있다. 그들은 변변찮은 우리의 단어 창고 안에도 존재하는 글자들을 꺼내와 풍성한 한상을 차려 놓는다. 화려하지 않아도 풍요롭고 장황하지 않아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을 맛깔스럽게 내어 놓는다. 그 글자를 맛본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희망의 환희에 도취되기도 한다.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여겼던 세상'

까딱하면 이 문장을 혼자만 느끼는 폐쇄된 세상이라 잘못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은 '모두가 느끼지만 아무나 표현할 수 없던 세상'이다. 나도 보고 너도 봤지만 말로, 글로, 또는 어떤 수단으로도 나타낼 수 없던 그런 세상 말이다. 

하늘이 서서히 주홍빛으로 물드는 일몰을 보며 각자의 감상을 떠올릴 순 있겠지만 랄프 왈도 에머슨이 산문 <자연>에서 표현한 것처럼은 할 수 없다. 


'대기에는 생기와 감미로움이 너무도 가득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떠나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감미롭고 아름다운 일몰.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일몰을 본 적이 있다. 단지 기록하지 못했을 뿐. 


우리도 바이런의 와인을 마셔봤고 헤밍웨이의 신발을 신어봤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찰나의 순간에 경험하고 영영 놓쳐버렸던 삶의 한 조각을 종이 위에 생생하게 남겨주었다. 글자는 우리에게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여겼던 세상, 알고 있지만 알지 못했던 세상을 열어준다. 그 세상은 종종 현실보다 선명하고 현실보다 달콤하다.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리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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