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자아
나의 언니와 나는 둘 다 영어를 가르친다. 우리는 학생들이 주로 하는 실수를 공유하며 자주 등장하는 실수의 원인과 패턴을 찾으며 티칭 방법을 함께 연구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만드는 순수하고 귀여운 실수에 한참 웃기도 한다.
하루는 언니에게 영어 과외를 받던 학생이 숙제로 한글로 된 웹툰을 영어로 번역해 왔다. 어색하지만 간단한 영어로 잘 번역해서 술술 읽고 있는데 갑자기 'Chicken is a leg!'라는 문장이 나왔다. 치킨은 다리 한 개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해서 원 문장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학생은 오히려 왜 이해 못하는지 의아해하며 이렇게 답했다.
'치킨은 다리지!'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 둘 다 놀랐다. 역시 치킨은 다리가 최고라는 문장을 '치킨 = 다리'라고 완벽하게 직역해 말이 안 되면서 되는 신기한 문장이었다. 우리나라 말에는 a와 같이 단수를 나타내는 관사가 없어서 충분히 이렇게 번역할 가능성이 있다. 영어에서는 명사 앞에 관사 a가 붙으면 뒤에 오는 명사(예를 들어 leg)는 그 부류를 통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된다. '치킨은 다리지'에서 처럼 '다리'가 치킨에서 맛있는 특정한 부위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닌 누구에게나 있는 일반적인 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로는 '치킨 = 다리'가 성립하지만 영어로는 성립하지 않는 특이한 상황이 발생한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치킨은 다리'라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먼저 치킨 부위로의 다리는 leg라고 하지 않고 통상적으로 drumstick이라고 부른다. 닭다리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 s를 붙여 복수형인 drumsticks로 만들어 준다.
혹시나 해서 네이버 영어사전에 drumstick을 쳐봤더니 이런 예문이 있다. 자주 느끼는 건데 영어 구어체는 영어사전의 일반 뜻풀이보다 VLIVE 자막이 더 완벽할 때가 많다. 드디어 '치킨은 다리지!'의 영문 번역 문제가 해결되었다.
식당에 물을 뜨러 갔다가 아래와 같은 문구를 봤다.
물이 마치 자아를 가진 것 같다. 잘못된 맞춤법과 번역 때문에 자아가 생기는 사물이 참 많다. 이 문장 역시 '은'의 자리를 채워줄 'is'가 없는 것만 빼면 위의 닭다리 이야기처럼 '물 = 셀프'가 성립된 것과 같다. 문득 물처럼 투명하고 맑은 자아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사실 학생들이 '물은 셀프예요'가 영어로 뭐예요?라고 물으면 답하기가 애매하다. 외국에서는 그런 말을 거의 안 쓰기 때문이다. 만약 물이 셀프인 식당에서 물을 달라고 한다면 '셀프예요'라는 답 대신 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나마 적절한 표현을 찾아보자면 알아서 자신을 서브serve하라는 의미의 'Water is self-serviced'를 쓸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 이런 말을 외국에서 들어본 적은 없다. 물을 달라고 하면 거의 다 가져다준다.
여담이지만 유럽에서 물을 주문할 때에는 꼭 'tap water(수돗물)'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네랄 워터나 탄산수를 갖다 주고 물값을 청구하기 때문이다. 수돗물을 먹고 싶은 사람은 별로 많지 않겠지만 후덜덜한 물값을 몇 번 내고 나면 수돗물도 맛있게 마시게 된다. (나는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그냥 물을 달라고 했다가 에비앙 미네랄 워터를 주는 바람에 물값으로 만오천원을 낸 기억이 있다.) 아무튼 우리나라처럼 물이 셀프인 곳은 많지 않다.
한참 치킨에 대해 이야기 했더니 슬슬 배가 고파온다. 바삭하고 촉촉한 닭다리가 땡기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