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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Oct 22. 2021

420개월 늦은 청약통장

성격이 급하고 만사를 마감일이 임박해서야 끝내는 나에게 계획적으로, 꾸준히 해야 하는 일은 반갑지 않은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계획과 꾸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깨닫기 전까지 나의 다이어리에는 1월과 2월만 존재했다. 3월부턴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흘러가는 드라마다. 


얼마 전 전국을 달궜던 뜨거운 뉴스거리가 있었다. 당첨되기만 하면 7억에서 8억의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다고 해서 온 나라가 들썩였던 강남에 있는 아파트가 그 주인공이다. 이미 말했듯 나는 응모와 당첨과 차익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다. 대체 아파트가 당첨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턱이 없었다. 아파트는 돈 주고 사는 게 아닌가? 그런데 당첨이 되어야 한다고? 

이곳저곳에서 주워 들으니 분양가와 매매가가 다르다는 게 이유였다. 두둥. 여기에서 1차 충격이 왔다. 돈만 있다고 새로 짓는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니. 청약통장 이력을 기반으로 당첨이 되어야 살수 있다고 한다. 청약통장은 또 무엇인가. 지나가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왜 만들어야 하는지 왜 꼭 필요한지도 몰랐다. 그 나이 먹고 아직 그런 것도 몰랐냐고 손가락질해도 할 말 없다. 난 내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서 바쁘게 살면 내 몸 누일 집 한 채는 당연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험악하고 치열한 부동산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청약통장의 취지는 좋은 것 같다. 현금부자들이 아파트를 싹쓸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테니. 그런데 그 청약통장까지도 피 튀기는 경쟁이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뭉뚱그려 알고만 있던 부동산 판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고 모두가 이 참여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부동산 열풍이 나라를 휩쓸며 청약통장의 존재를 그렇게 허무하게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나만 빼고 모두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열심히 뛰고 있는 이 게임에 참가하지 않으면 한번 뛰어보기도 전에 판에서 밀려날 것 같아 매우 늦은 건 알았지만 3개월 전, 부리나케 청약통장을 만들었다. 요즘엔 휴대폰 어플로 모든 것이 해결되니 정말 부리나케 만들 수 있었다. 늦게나마 시작한 사실이 뿌듯했다. 이 통장에 돈을 차곡차곡 부으면 아파트에 당첨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지? 당첨 되면 매매가보다 몇 억이나 저렴한 분양가에 집주인이 될 수 있다는 거지? 확실한 건진 모르겠으나 난 청약통장의 역할을 이렇게 이해했다. 


드디어 나에게도 내 집 마련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에 남들보다 조금 늦었지만 괜찮다고 달랬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차곡차곡 쌓으면 되지 뭐. 화려하고 정교한 내 상상의 세계 속에서 난 이미 아파트 소유주였다. 서울은 포기하더라도 몇 년 후면 깨끗하고 정비된 신도시에 아파트 하나가 내 명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부풀었다. 이렇게 단순하다 나는. 


그런데, 두둥. 2차 충격이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지인들을 만나서 자랑스럽게 청약통장을 만들었다고 공표했다. 칭찬을 기대하고 말한 거였는데 역시 나만 뒤늦게 달려든 게임이었다. 이제 기어가기 시작한 나에 비해 내 주변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뛰어가고 가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그들도 모르는 사이 무럭무럭 자라나 손에 쥐어진 청약통장 얘기를 꺼냈다. 아무것도 모르고 친구들과 희희낙락 술 마시러 다니던 시절, 그들도 나와 똑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 술 마시러 다녔지만 그 뒤엔 미래를 꿰뚫어보는 계획적인 부모님이 있었다. 

이미 대학생 때 부모님이 만들어 돈을 넣어주고 있었다는 이야기, 취업 선물로 받은 이야기 등 타인에 의해 꾸준히 입금된 청약통장을 갖게 된 경로는 다양했다. 게다가 통장을 만들기만 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월 납입액은 얼마가 유리하고 꾸준해야 하고 어쩌고저쩌고 다들 나름대로의 전략이 있었다. 전략이고 뭐고 통장 하나 개설하고 겨우 오만원을 넣었던 나는 매우 낙심한 마음으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친구를 만나 한탄하듯 털어놨다. 첫째가 벌써 초등학생이 된 친구는 청약통장의 중요성을 설파하더니 요즘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청약통장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두둥. 가장 센 3차 충격이었다. 너무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엔 기어가는 나에 비해 자동차를 타고 가는 그룹이 있었다. 침이 떨어지기 전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얼추 계산해봤다. 난 그들보다 35년이나, 420개월이나 늦은 것이었다. 내 또래들과 하는 경쟁도 못 따라가고 있는데 이제 신생아들과도 경쟁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와서 열심히 따라간다고 해서 가망이 있을까. 괜히 허튼짓만 하는 건 아닐까. 차라리 그 돈으로 맛있는 거나 먹고 그날그날 스트레스나 푸는 게 낫지 않을까. 


이래서 난 ‘소확행’이라는 말이 별로다. 결국 큰 건을 못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떡볶이 한 접시 먹고, 맥주 한 캔 먹으며 부동산 정책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다 잊어버리라고 겉핥기식으로 위로하는 것 같다. 괜히 열불이 나서 소확행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청약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집으로 재산 불리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도 다짐했지만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른다. 나에게도 천금 같은 기회가 오면 덥석 물게 뻔하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경쟁자가 너무 많다. 심지어 나의 경쟁자들 뒤에는 지식과 자본과 전략을 갖춘 부모들까지 있다. 그 뒤에는 조부모까지 있다. 이러다 발붙일 곳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 수도 있겠다. 늦은 건 생각하지 말고 미래만 생각하자. 꾸준함과 성실함은 날 어딘가로 데려다놓긴 하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다. 주변을 돌아봐도 온통 공사판이고 아파트는 새로운 지역에 새로운 모습으로 셀 수 없이 지어지는데 왜 경쟁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걸까. 그 많은 집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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