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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Oct 23. 2021

클로드와 제르망, 그리고 에밀

멀리서 라파네 집을 지켜볼 때 객석에 앉은 기분이었어요. 늘 궁금했죠. 저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영화 속 이야기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 클로드가 제르망에게 말한다. 이 대사를 보고 나는 내가 한 말을 화면에 옮겨놓은 줄 알았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인 더 하우스>는 완벽해 보이는 집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며 그 안에 침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린다. 

클로드 가르시아는 열여섯 살 소년으로 어릴 때 가족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 불구가 된 아버지를 혼자 보살핀다. 결핍으로 가득한 그에게 친구 라파가 사는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이층집과 집과 단란한 세 가족은 더없이 완벽해 보일 수밖에. 라파의 집을 멀리서 훔쳐보기만 하던 클로드는 라파 가족의 일상에 들어가 그들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글로 옮긴다. 그리고 그의 글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부족한 재능으로 꿈을 이루지 못해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 제르망의 눈에 띈다. 문학엔 관심도 없고 실력도 없는 학생들 교육에 회의를 느끼던 중 클로드의 솔직하고 신선한 글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제르망은 자신의 호기심과 예술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클로드를 이용한다. 라파 가족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결말로 마무리 짓기 위해 클로드가 가정에 침투해 그 역할을 해주도록 밀어붙인다. 본인의 예술적 결핍을 상쇄하기 위한, 또 지루한 일상을 탈피하기 위한 관음이다. 예술적, 문학적 완성도를 위해 도덕은 잠시 내려놓는다. 


클로드에게서 어렴풋하게 내 모습이 보였다. 다른 점이라면 남의 집에 직접 들어갈 용기가 없는 것과, 누구의 지도나 조종 없이 자발적으로 호기심과 관찰을 지속한다는 것. 걸으며 발견한 클래식한 통유리 창문 너머, 꽃과 나무가 무성한 정원 너머 은은한 조명이 감싸는 공간 안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성수동에 살 때 자전거를 타고 잠수교까지 다녀오곤 했다.  한남대교가 가까워 오면 늘 그렇듯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한강변에 줄지어 있는 고급 빌라와 아파트들이 하나 둘 고귀한 자태를 드러낸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창문들. 나는 그 창문들을 숭고히 여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뻔한 모양의 창문과는 선천적으로 다른 분위기와 색을 입은 창문들을 보며 그 창 너머에 살고 있을 사람들의 삶을 상상했다. 

바닥부터 천정까지 높고 길게 뻗은 유리 뒤에는 고전 소설에서 묘사되었을 법한 앤티크한 고동색 책상이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조화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을 것이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예술 관련 서적들일까. 아니면 고전 소설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소품은 아니지만 자기계발서나 투자 관련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을 수도 있다. 책상 옆에는 세련되고 고상한 취향을 한 눈에 보여줄 수 있는 LP들이 무심하게 쌓아둔 듯 놓여있을 테고 그 중 운 좋게 선택 받은 한 개의 음반이 유럽의 빈티지 마켓에서 사온 턴테이블 위에서 주인의 귀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우아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사람 키 높이를 웃자란 극락조는 그 단단한 청록색 잎을 힘주어 자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안에, 마치 이 모든 것이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듯, 젊은 부부는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하얀색 티셔츠에 약간 구겨진 린넨 바지를 입고 맨발로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한 손엔 와인을 들고 있겠지. 와인은 어떤 걸 마실까. 화이트일까 레드일까. 아니면 좀 더 센 포트와인? 의외로 소박한 취향을 가진 부부는 마트에서 산 평범한 와인을 마실 수도 있을 테다. 


여기까지 상상이 미치면 이제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정신을 차리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어디까지 왔을까. 등줄기는 땀이 식으며 서늘하고 하늘 중간쯤 걸터앉은 태양은 주변을 잘 익은 자몽 빛으로 물들이며 위엄을 뽐내고 있다. 인간의 상상력이 고작 이렇다. 창 너머 펼쳐지는 상상 속 삶이 고작 그 정도이고 온갖 오묘한 색깔과 형상을 뽐내고 있는 태양의 자태를 자몽이라고 밖에 비유할 수 없다. 한 번 더 절망한다. 


<인 더 하우스>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의 기분은 그렇게 상쾌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다. 상상만 해오던 내재된 욕망이 성취된 후 느끼는 공허함과 성취를 위해 맞바꾼 희생에 구멍 뚫린 마음이 꽉 찬 기분이랄까. 






아멜리 노통브의 기발한 소설 《오후 네시》의 주인공 에밀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이 소설 역시 모든 사건은 집을 배경으로 일어난다. 은퇴 후 아내 쥘리에트와 누구보다 규칙적이며 누구보다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던 에밀은 멀리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며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에겐 불평거리도, 근심거리도 없다. 노부부가 첫눈에 반한 새 집은 에밀에게 요새이자 아내의 품, 운명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들의 고요한 삶에 이웃집 남자 베르나르댕이 끼어들며 집안의 평온이 깨진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의문이 떠오른다. 베르나르댕은 에밀의 평온을 침범한 것이었을까, 에밀의 지루한 삶에 불을 지펴준 것이었을까. 


제르망은 클로드를 만나고 에밀은 베르나르댕을 만나며 자신도 잊고 살았던, 또는 자신도 몰랐던 욕망과 권력에 대한 욕구가 깨어난다. 에밀과 제르망 안에서 타오르는 예술의 불은 꺼지지 않았지만 노쇠한 육체와 함께 그들의 삶도 힘없이 늙어간다. 모자란 것 하나 없이 잘 정돈 된 삶이었기에 자극이 필요했던 걸까. 결말은 파괴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꿈꾸던 문학적, 예술적 서사를 이루고 자신의 일부를 잃는다. 


프랑스가 본고장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은 영화와 소설이 ‘집’이라는 공통분모로 만났다. 집을 탐하는 자와 집을 사수하려는 자. 그런데 이 파괴적인 결말을 알면서도 여전히 집을 탐하고 집을 사수하려는 나는 어떤 결말을 원하는 걸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나를 굴복시키고 끌어들이는 운명 같은 나의 집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 단지 운명의 집을 만난 후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사람을 굴복시키는 집들이 있는 법이다. 그런 집들은 운명 이상으로 거역 못 할 존재들이다. 첫눈에 사람을 함락시키고 마니까. 그곳에 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아멜리 노통브 《오후 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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