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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린 Dec 08. 2021

페미니스트 여성으로서 남성과 연애하는것

이대로 계속 너랑 만나야 할까?

너와 사귄지 140일째 되던 날의 기록.


 너 - 간호사 여자한테 아가씨 부르는거, 남자한테는 총각총각 부르던데 이거 어떻게 된거냐 (귀여운 이모티콘)

 나 - ㅋㅋㅋ남자 간호사한테?

 너 - ㅇㅇ 이거 성평등하게 털리는거 아입니까

 나 - 의사와 간호사 구분을 잘 하는 사람이군

 너 - 의사도 뭐 교수 아니면 취급이 ㅋㅋㅋㅋ 

 (중간 생략)

 너 - 어제 간호사 선생님께 이모라고 부르는 사람까지 등장했다는 말 듣고 문득 생각남 저번에 우리가 대화했던 주제. 남자도 비하발언 당한다구! 

 나 - (…그래서 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래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나? 순간 숨이 턱 막히고 메신저를 닫은 다음 구글에 '아가씨 총각'을 검색해 여러 사람들의 반응을 검색해본다. 나처럼 아가씨라는 말이 싫다는 사람도 있고, 알레르기 반응처럼 격하게 반응 하는 사람도 있고, 그게 나쁜 말도 아닌데 왜 유난이냐는 사람도 있고,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고, 아무튼 이런 저런 사람들의 댓글이 수백건을 넘어간다. 10분이 넘도록 고민하다 겨우 다시 메신저를 킨다.) 

 나 - 그랭 그렇구나....너랑 이런 주제로 얘기하는건 별로 즐겁지 않음. 너랑 나랑은 의견이 평행선에 가까워서 아무리 얘기하거나 이해해보려고 해도 별로 도움이 되진 않는 듯 

 너 - 고건 마따 마치 기찻길같은 느낌. 그럼 앞으로는 사회의 불합리에만 말하겠어

 나 - 그랭 그럽시다


 메신저를 닫는다. 마음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다.

 우울하다. 슬프다. 허무하다. 귀찮다. 

 분노보다는 무력감이 크다. 커다란 벽을 마주하고 있는 듯 하다. 


 날 때부터 페미니스트였던 내가 어쩌다 너랑 만나 처음으로 연애다운 연애를 하기 시작한지 이제 겨우 100일 조금 넘었을 뿐인데 가끔씩 이렇게 흔들릴 때가 있다. 이대로 계속 너랑 만나야 할까?




 나는 원래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관상용으로 잘 가꾼 것은 좋다. 성욕을 느끼는 대상도 주로 남성이다. 하지만 나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돌이 아닌 남성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보기좋게 가꾼 꽃인 줄 알았던 남성 연예인의 사생활에서 드러나는, 이른바 '일반인 남자다운' 모습을 보는 것도 끔찍하게 싫다. 그냥 직장 동료인줄 알았는데 '남자 사람'으로서 여자인 나와는 다른 면모를 볼 때마다 머나먼 거리감을 느낀다. 


 내 안에 있는 기본적인 인간은 '여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남성'은 내 기준으론 인간의 조금 바깥에 위치한, 어떤 이해하기 어려운 덩어리다. '남성'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아이돌', '연예인', '동기', '직장 동료' '친구' '연애 대상' 정도로 분류하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편하고 접근하기 쉽다. 내게 있어 '여성'이 '인간'과 거의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에 비해 '남성'은 같은 '인간'보다 극히 '남성'에 치우쳐있다.  


 그런데 그 '남성'보다 더욱 불가해한 것이 '남자친구'다. 혹은 '애인', '연인', '사귀는 사람'. 

 모르는 사람,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불쾌한 대화는 쉽게 그러려니 하면서 넘겨버릴 수 있다.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구나. 나랑은 의견이 다르네.'하고 넘기면 된다. 그런데 연인관계에서는 그게 쉽지 않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그래, 그렇게 도태되거라'하고 읊조릴수도 없다. 가까운 사이인만큼 나를 이해하고 내가 생각하는것과 비슷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니 답답하다. 


 애초에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주변 친구들을 보면 대체로 나와 비슷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 페미니스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페미니스트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여성이라는 말을 쓰는것부터 나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세상이 여혐과 남혐으로 나뉘어 전쟁통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현실 세계의 나는 안락했다. 내 주변에는 남녀차별, 여성이 겪는 사회적 문제들, 일상속의 여혐 요소들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페미니스트였으며,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땐 먼저 가시라며 인사하고 보내주면 될 뿐이었다. 


그런데 내 평온했던 페미니스트의 삶에 인터넷에서만 보던 '남녀차별이 일부 존재하는건 사실이나 모두 그런것은 아니며, 여성만 차별받는 것은 아니다. 여성 주차장은 폐지되어야하며, 여성을 아가씨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남성도 총각이라고 부른다. 일부 사람이 잘못된것이지 모든 남성이 잘못된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20대 남성이 불쑥 들어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너무 외로웠던 지난 겨울, 무슨 생각으로 '올해는 남자친구를 만들어보자'고 다짐했는지 모르겠다. 좋을 때가 없는 건 아닌데, 좋은 때도 많은데 가끔씩 이렇게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그냥 혼자인 편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여성 주차장에 대해 너와 내가 나눈 말들:

 나 - 여성 주차장은 주차장에서 여성을 타겟으로 한 범죄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 봐라. (뉴스 기사를 보여주며)

 너- 여성민우회는 일단 거른다. 이거봐라. (다른 기사를 가리키며) 여성전용주차장이라고 해서 더 안전한건 아니지 않느냐. 오히려 여성 운전자를 노린 범죄가 발생하기도 한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안전요원 확충이나 cctv 확대같은 방안을 강구해야지, 여성전용주차장을 설치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나- (민우회를 일단 거른다는 말에 기분이 상함) 여성들은 남성보다 일상생활에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도 설문조사 결과 통계가 있지 않느냐. 

 너- 남성도 어두운 곳이나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무섭다. 

 나- 남성이 느끼는 두려움과 여성이 느끼는 두려움의 수준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여자는 남성보다 일상생활에서 더 많은 위협을 느낀다. (왜 무차별 살인은 여성과 약자 위주로 이루어지는가? 왜 우리는 밤중에 길을 걸어갈때 누군가와 통화를 하거나 통화하는 척을 하라는게 팁처럼 도는가? 왜 우리는 탈의실에서, 화장실에서, 모텔에서, 내 집에서조차 누군가 설치해놓은 카메라가 있지는 않을까 불안해하는가? 수많은 억울함이 목구멍을 두드린다.)

 너- 그러니까 안전을 위해서는 여성전용주차장 말고 다른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여성전용주차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 - (이게 아닌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편하다.)

 



 맞벌이를 하면서 살림도 반반 하는건 이해하지만, 전업주부면서 반반 살림을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너의 주장에 대해 너와 내가 나눈 말들:

 나 - (전업주부여도 살림 좀 같이 하자고 할 수 있지….) 대체 누가 전업주부이면서 반반 살림을 요구한단 말인가? 근거를 대봐라.

 너 - 네이트 판을 보다보면 많이 보인다.

 나 - (네이트 판…머리가 아득해진다.) (통계청 자료를 근거로 한 신문 기사를 보여주며) 이걸 봐라. 아내가 전업주부일 때 아내는 하루에 6시간, 남편이 하루 46분의 가사노동을 하는것에 비해 맞벌이 부부는 아내 3시간 13분, 남편 41분 가사노동한다고 한다. 가장 골때리는건 아내 외벌이인 경우에도 아내가 2시간 39분의 가사노동을 하고, 남편은 고작 1시간 39분의 가사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전업주부 남편이 맞벌이 남편보다 더 일하지 않는다. 이게 통계고 팩트다. 네이트 판 말고 니가 말하는 주장의 근거를 가져와봐라.

 너 - 이게 진짜라고? 일도 안하면서 집안일도 안한다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

 나 - 그렇다. 이게 진짜다. 

 너 -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는 말투로 너는 나에게 묻지만 나도 묻고 싶다. 대체 왜 그러는가?)




 이 날 그동안 느꼈던 묘한 거리감들이 명확한 형태를 띠고 너와 내 사이에 자리잡았다. 나는 페미니스트고, 너는 평범한 20대 남성이었다. 나와 너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어 서로 평행선을 달리니 앞으로 이런 얘기는 하지 말자 했다. 나는 우울해졌고, 너는 네 말투가 어조가 강했던것같다며 좀 더 부드럽게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으로 수십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물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너랑 연애는 해도 결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얼핏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생각은 두꺼운 매트를 아무리 깔아도 불편하게 느껴지는 완두콩 하나처럼, 때때로 나를 괴롭혔다. 언제는 네가 너무 좋아서 평소에는 찾아보지도 않던 포털 사이트의 연애 섹션을 뒤적거리거나, 남의 결혼 생활 이야기를 보다가, 심지어는 김칫국을 사발로 마시고 육아 이야기까지 보다가도 문득 차갑게 식어 결혼은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네가 나중에 네가 일하는 지역으로 옮겨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할 때에도, 나는 마음속 한 구석에서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그 때까지 사귀고 있을까 생각했다. 


 너와 나는 페미니즘적인 관점 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사회적, 정치적 사상도 많이 달랐다. 결혼한 친구의 '사상이 같다고 해서 즐겁진 않다.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취미가 같은 게 훨씬 나은 것 같다'는 말에 그래, 서로 생각은 다르더라도 우리는 게임이나 만화나 스포츠, 주식, 음식 등에 대한 취미가 비슷하니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네가 정치 이야기를 할 때, 비판보다 빈정거림에 가까운 논평을 할 때, 중국집을 짱깨라고 부를 때, 생리가 늦어지는 걸 보고 임신 아니냐며 농담을 할 때, 운전 중에 날카로워질 때, 다리가 후덕해졌다고 할 때, 국민 평균 5등급을 이야기하며 민도라는 말을 쓸 때,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촉발된 미국 시위에서 걔네들은 시위를 하면서 가게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하니까 문제라는 말을 할 때, 처음 한 눈썹 문신을 볼 때마다 품평하듯 유심히 쳐다볼 때,


 그 모든 때마다 나는 너와 한없이 멀리 있는 듯 했고 커다란 벽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막막했다. 나는 늘 너를 만날 때 초조했고, 불안했고, 안하던 제모를 했고, 내 음식 취향이 너의 수준에 맞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너희 업계의 전문 용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알아듣는 척 했고, 모르는 정치 사회 경제 용어를 들으면 기억했다가 나중에 검색해봤다. 나는 자존심이 강해서 네가 장난처럼 내가 모르는 걸 구박하는게 싫었다. 


 네가 그냥 내 친구였다면, 나는 너를 만나지 않았을거다. 네가 내 심기를 건드린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기대감을 내려놓고 그저 그런 친구로, 그저 그런 사이로, 그저 그런 남으로 멀어졌겠지. 그렇게 하지 못해서 지금 나는 너무 괴롭다. 슬프다.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무겁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주말이 되면 나는 다시 아무렇지않게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아주 멀리 떠나고 싶다. 버스를 타고 바닷가로 가서 하루종일 발을 담그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파도 치는 대로 흔들리며 떠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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