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멍청했다
685일.
너와 내가 사귀기로하고 헤어지자고 말을 꺼내기까지 걸린 시간.
태어나서부터 비혼주의자였고, 언제나 미래를 생각하면 넓은 집에 개를 키우며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도 그런 내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모습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였는데, 어느새 나는 너와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2년 전으로 돌아가 '너는 앞으로 누군가와 사귀게되고, 그 상대와 진지하게 결혼하고 싶어하고, 그러다가 헤어져서 하루종일 눈물을 질질 흘릴정도로 후회하게된다'고 한다면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를 드디어 미친게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까.
그만큼 나는 너를 만나 많은게 바뀌었다. 혼자였다면 경험해보지 않았을 다양한 일들을 겪었고,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다림, 익숙함, 기대감, 불안함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던 나를 발견했다.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헤어짐을 고한 내가 너무나도 멍청하고 한심하고 후회스럽다. 내가 왜 그랬을까.
헤어지자고 먼저 말한건 나였다.
원래도 한 시간 거리에 살던 너와 나였지만 이제는 편도로 두 시간 거리, 그것도 한 달에 한 번 겨우 만날 수 있는 장거리 연애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빠르게 초조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 못해도 이주에 한 번은 꼭 만나던 우리였는데 얼굴을 보지 않은지 3주가 되고 4주가 되자 나는 불안해졌고 불안은 더욱 많은 생각을 불러왔다.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점점 덩치를 키운다. 여기에는 너와 나의 사회적 경제적 차이도 한 몫했다.
나는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내년이나 내후년이라도 좋으니 결혼하고싶다고 했다.
너는 직업적으로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난 5년 후를 이야기했다.
나는 5년뒤면 서른 다섯이고, 별 볼일 없는 지방직 공무원에, 집안 재산도 내 개인 재산도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여자지만
너는 5년뒤면 누구나 선망하는 이상적인 직업을 가진데다 집안 재산도 네 개인 재산도 넉넉한 좋은 남자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나는 결혼시장에서 지금이 최고가고, 5년뒤에는 그 가치가 떨어질것이라고 말했다. 너도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결혼을 하고 싶은거라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게 맞겠지.
정당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야기였다. 더럽게 이성적이었다. 헤어짐을 고하면서 질질 짜면서도 나는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네가 물었다.
너는 나와 결혼하고 싶은거냐, 아니면 그냥 결혼이 하고 싶은거냐.
나는 구분할수 없었다.
나는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서, 나는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 들었는데 그 상대가 바로 너라서.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멍청하게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네가 아니면 안된다고 말했으면 너는 그 자리에서 나를 붙잡아줬을까.
나는 이별을 고하면서도 네가 나를 잡아주기를 바랬다.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다. 이별을 고한 다음날 하루종일 우느라 사무실 사람들에게도 들키고 운동하러갔던 곳에서도 마음 정리되고 오는게 낫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원래도 눈물이 많기는 하지만 이유도 없이 이렇게 문득문득 치밀어오르는 눈물은 처음이었다. 처음 너와 헤어짐을 생각했을때만큼이나 혼자서 계속 울었다.
다행히도 좋은 친구들이 그런 나를 걱정해 전화를 하기도 하고 직접 찾아와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도 했고, 세상에 남자는 많다고도 했고, 어차피 결혼은 현실인데 집안 차이가 그렇게 심한걸 네 자존심으로 버틸 수 있겠냐, 차라리 헤어지길 잘했단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구질구질하게도 내가 헤어짐을 고하고 다시 연락했다. 잘못했다고, 다시 만날 수 없겠느냐고.
너는 우리와 대화했던 그 더럽게도 이성적인 이야기를 길게 풀어 이야기했고, 너의 결심은 단단해보였다.
나는 몰랐다. 네가 나 이전에 두 번 다른 사람을 사귄적이 있다고 했었고, 그 헤어짐의 이유가 상대방의 바람이라고 했었지만 그 사람들도 너와의 결혼을 원하다가 너 몰래 다른 사람을, 결혼을 할 사람을 찾아 바람을 피웠을 줄은 몰랐다. 너는 제법 그 상처가 컸던 모양이다. 너는 그 사람들을 붙잡아봤다고 했었지만 나는 붙잡지 않았다. 한 번 헤어졌던 사람들은 다시 또 그 이유로 헤어진다고도 했다.
나도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되냐고 물어보고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처음인 기회가 너에게는 세번의 실패가 될 수도 있을테니 말할수가 없었다.
너는 내가 너랑 5년뒤에까지 사귀면, 결혼할 생각은 있었어?
있었다고 너는 대답했다. 나는 또 울었다.
너랑 결혼 안해도 되니까, 그냥 다시 만나면 안되냐고 물었다.
너는 한 번 그런 생각이 들면 또 이런 일이 벌어지기 쉽다고 말했다. 아마도 너의 경험과 상처로 얻은 교훈이겠지.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네가 너무 보고싶었고, 보고싶은데 보지 못해서 불안이 쌓였고, 그래서 결혼을 하면 너와 떨어져있어도 같은 테두리 안에 있으니 정서적으로 더 나아질거라 생각했다.
너는 네가 펜스룰을 지키며 주변에 거리를 두고 있는데 내가 불안했다고하니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내가 말하는 불안은 네가 바람을 피울까봐 걱정하는게 아니었다. 그냥 얼굴을 보지 못하니까, 매 주 보던 얼굴을 보지 못하고 품에 안기지 못하고 온기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 상태가 불안한 것 뿐이었는데.
나는 5년을 기다릴 자신이 없다고, 헤어지자고 했다. 너는 동의했다. 미안하다고도 했다. 네가 챙겨준 간식을 들고 가면서 나는 두시간동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초행길이었지만 늦은 시간이었고 차는 많지 않았다. 쉬지않고 차를 몰아 어깨가 뻐근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눈물이 터진건 집에 도착해서였다.
나는 처음이라 서툴러서, 말하기에 너는 이미 같은 상처를 세번째 입었다.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먼저 헤어짐을 고한게 나였고 우리 사이의 신뢰를 깨뜨린것도 나였다.
얼기설기 붙이고싶어도 한 번 깨진 찻잔을 완벽하게 복원하기는 쉽지않다. 말끔하게 이어붙인것같아도 흠집은 남기 마련이다.
네가 답장을 해줬으면 좋겠다. 다시만나자고 해도 좋고,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해도 좋다.
불확실한 마음은 불안을 부채질한다. 내가 너랑 다시 사랑할 수 있을지, 아니면 사랑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할지. 나는 너의 대답에 따라야한다.
친구가 그랬다. 자기도 첫 번째 연애와 이별을 겪고 너무 힘들었지만, 그 뒤로도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이 찾아오더라고.
나도 그럴까. 나도 시간이 지나고, 오늘의 일이 담담해지고, 그저 한 조각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결혼까지 생각할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나랑 결혼하고 싶은게 아니라, 너라서 결혼하고 싶었던건데.
어떻게되었든 이미 찻잔은 깨져버렸다. 내 부주의함과 성급함으로, 내 손으로 망가뜨렸다.
우리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각자 더 좋은 사람, 잘 맞는 사람을 만나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