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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ㅈ가 Nov 30. 2020

운은 존재할까?

<운을 읽는 변호사>를 읽고

본 리뷰는 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포함한다.



난 글쓰는 걸 즐긴다. 조금이나마 좋은 글, 최소한 어제보단 봐줄만한 글을 쓰려고 신경쓰는 편이다. 언젠가 책을 쓰고 싶단 막연한 목표도 있다.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이 목표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좌절감을 느낄 때도 많다. 특히나 좋은 글을 읽을 때 그러하다. 비범한 문인들의 글을 읽다보면, 나는 평생가도 이런 글은 못 쓸거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비범한 필력을 바탕으로 한 글의 구성과 통찰력은 내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우수한 작품은 나에게 여운과 좌절을 같이 안겨준다. 여운은 작품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며, 좌절감은 나의 평범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책을 쓰는건 정말 먼 훗날의 까마득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운을 읽는 변호사> 같은 책을 읽다보면 사라진 희망이 다시 샘솟는다. 좌절감은 안도감으로 바뀌며, 언젠가 책을 쓰겠다는 나의 목표가 그리 불가능한 게 아님을 깨닫는다. 정말 혹평을 하자면, 이런 책은 나도 쓰겠다. 프로 축구에서 공격수가 손쉬운 1대1 찬스를 놓치는 걸 보고, 팬들이 “저런건 나도 넣겠다.” 말하는 차원이 아니다. 실제로 일반인은 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결코 골을 넣을 수 없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간극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다. 따라서 “저런건 나도 넣겠다.” 는 말은 현실과 거리가 먼 하나의 강도 높은 비판일 뿐이다. 하지만 위에서 내가 얘기한 “이런 책은 나도 쓰겠다” 는 그저 비유적인 비판이 아니다. 정말로 이런 책은 나도 쓸 수 있을거란 확신이 든다.


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운은 존재한다. 운을 좋게 만드는 방법도 존재한다. 그건 싸우지 않고, 겸손하게, 착하게 사는 것이다.”


결국 운은 어느정도 통제 가능한 영역에 있으며,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용된다는 얘기다. 우선 나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운의 존재를 믿으며, 인생에서 상당히 결정적인 부분이라 믿는다. 하지만 모든 운이 통제 가능하다고 보진 않는다.

작가는 모든 에피소드에서 비슷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누군가는 평소 행실이 훌륭하여, 주변에 좋은 사람과 어울렸으며, 이는 좋은 운으로 이어져 성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좋은 행실을 행하는 건 인간에게 달려있으므로, 결국 운은 인간에게 달린 것이란 메시지다. 


그러면 여기서 드는 의문은, ‘평소 행실이 훌륭한 건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다. 

나는 훌륭한 행실은 올바른 교육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교육’의 가장 큰 주체는 가정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학창시절 만나는 선생님도 포함될 수 있다. 부모나 선생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훌륭한 인품은 어떤 부모를 만나는지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부모 밑에서 교육 받을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운이다. 어찌보면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운이며, 이 운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인생에서의 성공과 성취는 깊게 생각해보면 모두 통제할 수 없는 운에서 온다. 우린 운이 아니라 말할지 모른다. 나의 성공은 오로지 개인의 노력과 재능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과 재능이 철저히 운과 별개의 요소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는 성공에 운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지만, 길게 보면 그 운은 우리가 통제 할 수 없는 영역에서 비롯된다고 보기에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 수긍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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