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2002
뮌헨에서 취리히행 기차(ICE)를 탔다. 특급열차인데도 예약이 필요 없다고 한다. 하얀색에 몸매도 날렵한 것이 지금까지 타본 기차 중 최고로 깨끗하고 좋다.
이틀 연속 잠이 좀 부족했다. 기차에 타면 무지 졸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럼 그렇지. 이쁜 풍경을 눈앞에 두고 또 졸린다. 이 기차는 탁자를 넓게 펼 수 있어서 좋다. 엎드려서 좀 자다 일어나서 풍경을 보다, 또 막 눈이 감긴다.
커피를 시켰다. 고맙게도 눈곱만 한 에스프레소가 아닌, 큰 컵 가득 커피가 나온다. 한 모금 마시니 정신이 반짝 깬다. 오래전 새마을호 식당 칸에서 마셨던 헤이즐넛 커피가 생각난다. 새마을 호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 식당칸은 이용객이 드문 데다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도록 되어 있어서, 거기 앉으면 가슴이 탁 트이며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커다란 통창 밖으로는 스치는 들판과 산, 강과 호수 풍경들이 눈 가득 들어왔었다.
취리히에서 바로 루체른행 열차로 갈아탔는데 스위스 열차는 더 좋다. 소음 없이 스르르 미끄러져 간다. 노래, ‘박하사탕’을 흥얼거렸다. 내가 지도를 맡고 있는 밴드부에서 멤버들이 그 곡을 연습 중이라고 한다. 애착이 가는 노래다.
루체른에 도착해서 호스텔에 짐만 던져놓고 급히 나왔다. 3시가 넘었는데 점심도 못 먹었다. 슈퍼에서 빵과 버터, 치즈를 사 가지고 강가로 나와 앉았다. 독일에서 사 온 맥주 한 캔을 텄다. 늘 비가 내렸던 뮌헨을 떠나 모처럼 맑은 날씨를 마주했다. 지금 곧 출발하는 유람선이 있지만, 여기서 더 뭉그적거리다 햇빛이 좀 사위면 그때 타야지. 맥주는 이럴 때 마시라고 있는 것이다.
맞은편 산과 강, 강 위를 떠다니는 오리들을 보며 부딪히는 물소리를 들으며 좋은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스위스에 막 도착했을 때는 더웠는데, 그늘에 앉아 있으니 오슬오슬하다. 그러나 기분 좋게 서늘하다. 발치 아래까지 백조가 다가온다. 봄이랑 여름이가 보면 까르르까르르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날 텐데. 내년에 함께 갈 말레이시아에도 애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마지막 남은 맥주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일어섰다.
루체른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는 동안, 풍경은 정말 아름다운데 왜 이리 졸리는지. 가만히 앉아서 보는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나를 졸리게 하나보다. 슬슬 지루해진다. 그래, 풍경만으로는 안 된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해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고프다. 종일 기차 타고 유람선 타면서 내내 혼자다.
이렇게 예쁜 곳에 이렇게 예쁜 집을 짓고 사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우리와는 어떻게 다를까?
웬 유람선을 이렇게 오래 타는 거야? 두 시간 가까이 타다 보니 이제 예쁜 풍경도 지겨워진다. 이제 비슷한 모양의 예쁜 풍경은 그만 보고 빨리 땅에 도착해서 인터넷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다.
안타깝게도 유럽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스위스에 대한 내 수첩의 기록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끊겨버린 도로를 마주한 것처럼 당혹스럽다. 파편처럼 출몰하는 몇 개의 이미지들이 있을 뿐, 20년이 지나버린 그때의 기억은 이야기를 이끌어갈 얼개가 되어주지 못한다.
내 여행의 기록은 어쩌면 후일에 기억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여행의 일부, 혹은 여백으로 늘 함께 했던 동행 같은 것이었나 보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고 놓쳐버린 기억들은 어느 지점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동행처럼 그렇게 사라져 버렸나 보다.
그래도 너무 좋아서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환하게 웃음 지었던, 기록에 남지는 않았지만 선명한 장면이 있다. 인터라켄에서 미니 열차를 타고 올라가 눈 덮인 마터호른을 구경하고 나서다. 다시 열차를 타고 내려갈까 하다 몇몇 사람들이 그냥 걸어내려가는 것을 보고 나도 그냥 걷기로 했다.
그때 눈앞에 펼쳐지던 초원처럼 드넓은 산등성이들, 내 몸 위로 내려앉던 그 따뜻한 햇살, 선선한 바람과 공기, 그 한없는 여유와 자유로움.
흐지부지 끝나버린 내 여행기록은 그때 내가 나에게 했던 말만 짧게 남아 있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괴롭히지 않는 거야.
지금 이게 나야. 너무 좋지 않아?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또는 '이렇게 살아야 해' 같은 생각이 자기를 괴롭히는 거야.
있지도 않은 자기에 대한 환상을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