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위사에서 화엄사까지, 2017 겨울
어쩌다 보니 언니네 집에서 3일 밤이나 묵게 되었다. 둘째 날에는 언니랑 근처에 있는 예술가 마을을 둘러보았다. 지리산 자락 산골에 현대식 집들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그곳은 정말 예술가들이 모여사는 것일까?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는데 세련된 건축형태를 보여주는 집들은 저마다 꽤 근사한 정원들까지 갖추고 있어서 딱히 예술가 마을이라기보다 부촌 같은 느낌이었다.
예술가 마을을 돌아보고 화엄사로 갔다. 화엄사는 전에도 가본 적이 있지만 어떤 느낌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하얀 눈이 폴폴 날리는 오늘의 화엄사는 한껏 고적하면서도 가슴 뛰게 아름다웠다.
다음날 언니 집을 떠나면서 함께 들렀던 구례 5일장은 설 대목이라 몹시 붐볐다. 크기도 엄청 컸고 정말 다양한 점포와 물건들이 나와 있어서 둘러보는 내내 신기했다. 어릴 적에 보았던 장터 생각이 나기도 했다.
언니는 그곳에서 살찐 갈치 두 마리를 사서 모두 내게 주고, 집에서 바리바리 싸온 과일이며 말린 감이 든 보따리도 내게 건넸다.
언니 부부는 얼굴에 상처를 입은 채 손님으로 찾아든 나를 마음을 다해 보살펴 주었다. 난 누가 집에 오든, 언니 부부에게도 늘 특별할 것 하나 없이, 언제나 숟가락 하나만 더 올린 것처럼 부담 없이 맞곤 했었다. 그것이 서로에게 편하다는 변명을 앞세우며.
그러나 사람 사는 것이 부담없이 편한 것만으로 갈음될 수는 없고 때로는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 있으면서 3일 동안 머리도 안 감고 샤워도 안 하는 기록을 세웠지만 하나도 거북하지 않았다. 막상 구례를 떠나 집으로 향하면서는 ‘아, 이제 집에 가서 씻고 싶다’ ‘애들도 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됐지 않은가? 마침내 돌아오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 여행.
템플 스테이 후기에 썼던 것처럼 삶도 여행도, 사람과의 만남이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것같다. 이번 여행은 특히 그랬다. 민박집 아주머니, 대흥사 템플 팀장, 구례 언니 부부. 나를 겸손하게 하고 감사함을 느끼게 해 준 소중한 만남들이었다.
이제 어디든, 언제든 주저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2월 10일에 종업식을 하면, 라오스로 떠나고, 3월 중순이나 4월에 스페인 아니면 동유럽으로 떠나자. 그리고 그 후엔 퇴직을 맞이한 나의 새로운 업, 글쓰기와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