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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Sep 14. 2023

영화, 이니셰린의 벤시

                       - 내 삶의 의미를 위한 투쟁


  어느 날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 여겼던 이에게서 당신을 그만 보고 싶다는 선언을 듣는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영화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그리고 이런 일방적인 관계의 단절이 어떤 갈등과 불화의 과정으로 전개되는지를 보면서 나는 내가 어떤 관계 안에 들어갔다가 밀려났거나 스스로 나와버린 게  된 경우들을 떠올려 보았다. 양상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겠지만 누구의 삶에서도 한두 번쯤은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이다.


  21세기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이 영화는 아일랜드 본토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1923년, 전쟁과는 별 상관없는 것처럼 평화롭고 단조로운 작은 섬(가상의 섬), 이니셰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밴시는 아일랜드에서 죽음을 알리는 정령이라고 한다. 영화는 너무나 다양한 해석의 여지와 감상 포인트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나는 오후 두시면 늘 펍에서 만나 맥주를 마시며 별 의미 없는 수다를 주고받던 두 남자와 그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서로 짝도 없이 중년에 접어드는 여동생과 함께 사는 파우릭(콜린 파렐), 그리고 역시 독신으로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콜름(브랜던 글리슨)이 그들이다. 여느 때처럼 펍에서 콜름을 만나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에 들떠있던 파우릭에게 콜름은 더 이상 그와 그런 시간을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갑작스러운 결별 통보에 놀란 파우릭이 이유를 묻자 콜름은 말한다. 

  “그냥 네가 싫어졌어.” 그러니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며 별다른 해명도 없이 자리를 떠버린다.





  도대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파우릭은 다음날에도 펍에 가서 콜름에게 이유를 물어본다.

  “넌 지루해. 인생에 지루함을 둘 시간이 없어. 세월이 너무 빠른 것 같아. 남은 인생은 사색하고 작곡하면서 보내고 싶어. 너랑 무의미한 수다나 떨면서 보내는 게 아니라.” 

  그러자 파우릭은 말한다.

  “무의미한 이야기가 아니라 좋은 이야기지. 다 사는 이야기지”

   여기에서 이 두 사람이 상대와 삶을 대하는 차이가 보인다. 콜름에게 파우릭과의 시간은 지루하고 무의미한 킬링타임이고 파우릭에게 콜름과의 시간은 일상과 정을 나누는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인 것이다.


  파우릭은 콜름이 우울해서 그러나 보다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루아침에 이럴 리가 없다. 그래서 그다음 날엔 콜름을 찾아가 설득을 해보고 그다음 날엔 화를 내며 따져보기도 한다. 그러자 콜름은 파우릭을 질겁하게 하는 선언을 한다. 계속 귀찮게 말 걸면 귀찮게 할 때마다 양털 깎는 가위로 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버리겠다고. 바이올린을 켜는 왼손가락부터. 여생동안 몰두하고자 하는 바이올린을 켜는데 필요한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는 말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선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콜름의 이런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파우릭은 어떻게든 그와의 다정했던 관계를 복구해 보고자 그다음 날도 그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본다. 포기가 안 되는 것이다. 보는 이에게는 파우릭의 이런 행동이 참 미련스럽고 답답할 지경이다. 또 일방적으로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밀어붙이는 콜름의 행동 또한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긴 콜름은 경악스럽게도 정말 왼쪽 검지를 잘라 파우릭의 집 문 앞에 던진다.      


   파우릭 대신 콜름에게 자른 손가락을 가져다준 여동생 시오반은 콜름에게 묻는다. 파우릭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거냐고. 그는 대답한다. 침묵, 그냥 침묵해 주기를 원한다고. 한 줌의 평화를 바랄 뿐이라고. 다음엔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넷을 자를 거라고. 그러면서 그는 그녀에게 묻는다. 이룬 것도 없이 죽어갈까 봐 두렵지 않으냐고.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지만 사실 그녀도 콜름처럼 이 섬에서의 생활이 외롭고 지겹고 이렇게 살다 죽을까 봐 두렵다.     


  그 와중에도 콜름은 경관에게 두들겨 맞고 쓰러져있는 파우릭을 마차에 태우고 대신 마차를 몰아준다. 그를 끊어내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와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다정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갈림길에서 그에게 말고삐를 건네주고 그들은 각자의 길로 향한다. 여전히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는 파우릭은 바에서 마주친 콜름에게 호기를 부리며 따진다. 착하기만 할 뿐 지루하고 덜 떨어진 존재였던 파우릭에게서 다른 면모를 본 콜름이 모처럼 지루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날 파우릭은 또 콜름을 찾아가 전날의 행동을 사과하고 다시 다정하고 지루한 사람으로 돌아가 관계 개선을 시도한다. 그러나 돌아온 콜름의 반응은 나머지 왼 손가락 네 개를 다 잘라서 파우릭의 문 앞에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이들의 기괴한 싸움과 미래가 없는 섬에서 벗어나 본토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 시오반은 이 기막힌 장면을 보고 당장 짐을 꾸려 섬을 떠난다. 떠나는 시오반을 배웅하고 돌아와서 그는 애지중지하던 조랑말 제인이 콜름이 던진 손가락을 먹다가 목에 걸려 죽은 것을 보게 된다.      


  애초에 파우릭에 대한 콜름의 결별 선언은 자기 삶이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콜름은 이 지루하고 허무한 삶의 나머지는 의미 있는 일, 음악가로서의 성취를 위해 작곡을 하며 살겠다는 실존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 안에는 의미 없는 시간들, 즉 파우릭과의 시간을 잘라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콜름이 삶의 의미를 찾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파우릭의 존재 의미는 영문도 모른 채 부정당하게 된 것이다.


   실존적 선택에 대해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이지만 사는동안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자기의 본질을 형성해 나간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에는 필연적인 아이러니가 따르기 마련이다. 콜름이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했던 선택이 타인의 삶, 즉 파우릭의 삶의 의미를 훼손하고 모욕하는 행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콜름의 선택은 자기 혼자만의 선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를 맺어왔던 파우릭과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다툼은 상대방 삶의 의미와 상충되는 것이어서 둘 중 누구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맺었던 많은 관계들을 반추해 보며 기시감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파우릭은 삶의 가치를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과 거기에서 만나는 ‘다정함’에 두고 있다. 다정한 관계들, 일상을 나누며 함께 의지하고 사는 여동생, 집안으로까지 들이며 귀여워하는 조랑말 제인, 매일 펍에서 만나 즐겁게 얘기 나누는 콜름,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파우릭만은 함께 어울려주는 동네 바보 도미닉 등, 이 안에 깃든 ‘다정함’이 그에게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외로움이니 허무니 지적 성취니 하는 뜬구름 같은 것들은 없다.      


  반면 콜름은 이러한 파우릭과 어울려 지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가 지루하고 덜 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남는 것 없이 흘러가 버리는 일상이 아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 예술과 지적인 성취를 우위에 두는 사람이다. 음악가로서 특별하게 성공하지 못한 채 이 작은 섬에서 무료하게 살고 있지만 이제라도 음악을 통해 남은 생의 의미를 찾기로 결심하고 그 일에 걸림돌이 되는, 그러나 싸움의 과정에서도 드러나는 파우릭에 대한 ‘다정함’을 매몰차게 끊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자기의 손가락까지도 잘라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영화는 콜름의 선택이 초래한 파우릭과의 갈등, 그 투쟁의 과정에서 싸움을 끌어가는 단호함의 주체가 콜름에서 파우릭으로 바뀌는 양상이다. 제인의 죽음에 분개한 파우릭이 콜름을 찾아가 제인의 죽음을 알리자 콜름은 깜짝 놀라며 이제 이 싸움도 끝낼 때가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파우릭은 끝나지 않았다고, 이제 시작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내일 오후 두시에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개는 죄가 없으니 문 앞에 내놓으라고 한다. 실제로 다음날 두 시에 파우릭은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집안에 콜름이 있는 것을 보고도 개만 데리고 돌아와 버린다. 


   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싸움 끝에 다음 날 콜름의 집 앞 해변에 두 사람은 함께 선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 한 고비를 넘긴 것 같다. 콜름은 본토의 총소리가 잦아드는 걸 보니 곧 전쟁이 끝날 것 같다고 하는데 파우릭은 끝나지 않을 거라고,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들은 그냥 넘겨지지 않는 거라고. 그것은 아일랜드의 내전이 끝나더라도 내전을 촉발했던 그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계속될 거라는,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내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지만 한 고비를 넘긴 그들의 갈등도 그와 같을 거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사진 이미지들 중 일부는 이니셰린의 밴시 | 다음영화 (daum.net)  에서 이미지 차용


  어쩌면 파우릭은 콜름 안에 있는 또 다른 자기의 일면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불가피하게, 독하게 끊어내야 하는 습관이나 취약한 어떤 것. 파우릭이 떠나고 혼자 남은 콜름은 전 날 작곡을 마친 자기의 곡, ‘이니셰린의 밴시’를 흥얼거린다. 콜름은 왼쪽 손가락을 모두 잃고 집도 불에 탔을망정 꿈꾸던 대로 음악적 성취를 이루었다. 한편 여동생도 떠나고 바보친구 도미닉도, 조랑말 제니도 죽어버려 혼자가 된 파우릭은, 그의 삶의 의미였던 ‘다정함’을 모두 잃어버린 그 지점에서, 같은 혹은 다른 삶의 의미를 찾아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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