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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Oct 12. 2023

그리운 토마스

- 스페인, 바르셀로나


  안내받은 룸에 들어가서 짐을 대충 풀었는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옆 침대에 걸터앉으며 쿨하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난 토마스 야.”

  “안녕, 난 애니.”

  나도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왔다고 했다. 바르셀로나에는 4일 동안 있었고, 북쪽으로 두어 시간 거리에 안도라라는 작은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형이 살고 있어서 거기 갈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우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의기투합해서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정해둔 곳 없이 한참을 걸었고, 걷는 동안 계속 얘기를 했다.


  “무슨 일해?”

  “음~. 선생님이었어. 근데 두 달 전에 그만뒀어.”

  “선생님이었다고? 난 학창 시절에 좋은 학생은 아니었는데. 수업시간에 짝꿍이랑 장난이나 치고... 그럼 이제부터는 뭐 할 거야?”

  “어려서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어. 글을 쓰고 싶어. 사진도 찍을 거야. 둘 다 할 수도 있고 그 두 가지를 섞을 수도 있어.”

  “멋진 계획이네.”

  “근데 아르헨티나에서는 사람들이 다 너처럼 영어를 잘해?”  

  “아니, 난 대학도 나왔고 공부를 많이 한 편이라서.”

  “전공이 뭐였는데?”

  “의학 공부를 했어.”

  “그럼 의사야?”

  “전문의는 아니고 레지던트야.”


  한 달 휴가를 받아서 유럽 여행에 나섰고 바르셀로나가 첫 여행지라고 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레지던트라는 직위가 월급도 많지 않고, 전문의가 되기도 무척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영 안 되겠다 싶으면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든 다시 의학 공부를 시작할까도 생각 중이라고, 그러면 또 6,7년간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도 쉽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이곳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일반 스페인어와는 전혀 다른 까딸란 어를 쓰는데, 토마스는 까딸란 어를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는 멋진 옷차림의 중년 여성에게, 어디로 가면 좋은 식당들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가 한참 길게 설명을 했는데, 그는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내 경우에는 영어로 길을 묻는 거야 쉽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빠르거나 설명이 길어지면, 내가 들은 만큼의 정보로 정확하게 길을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첫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좋은 동행을 만나, 함께 밤거리를 쏘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밤이지만 거리에 물결치는 선남선녀들이 하나같이 멋지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우리가 골라 들어간 식당은 편안한 펍 같은 분위기였는데, 별로 비싸지 않아서 만 원 안팎이면 음료와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토마스는 내가 맥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이미 세 잔을 마셨다. 아르헨티나에서 이 정도 알코올은 껌이라고 했다. 

  내가 내 몫의 계산을 하려고 하자, 그는 자기가 나를 초대한 것이라고 하면서 계산을 했다.

  “그럼 내일은 내가 살게”


  돌아오는 길에 그가 물었다.

  “남자 친구 있어?”

  “응”

  “그럼 남자 친구랑 함께 살아?”

  “아니, 딸들이랑 살아.”

  “그래? 딸들은 몇 살인데?”

  “스물두 살, 그리고 스무 살.”


  그는 내게 아르헨티나 말을 한 단어 씩 따라 해 보라고 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 했더니 나중엔 그 단어들을 이어서 한 문장으로 말해보라고 했다. 내가 통 문장으로 따라 하자, 그는 키득거리며 그게 무슨 말인 줄 아느냐고 물었다. 아르헨티나 말로 ‘son of bitch’란다. 빵 터졌다. 그는 정말 웃긴다.  

   

  난 저녁 내내 그와 함께 무척 즐거웠고 그의 얘기에 까르르 많이 웃었다. 우린 내일도 함께 다녀 볼까 하고 서로의 일정을 물어보았다. 그는 그냥 시가지를 돌아보고 비치에도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카사 밀라와 카사 바트요 관람 예매를 해두었던 참이다. 서로 보내고 싶은 일정이 맞아떨어지지는 않았고, 확실하게 어떻게 하자는 결론도 없었다. 









 그렇게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12시 넘어 호스텔에 도착했다. 우리는 한껏 들뜬 채 룸에 들어섰는데, 나갈 때까지 비어 있던 룸에 세 명의 룸메이트가 더 들어와 있었다. 갑작스러운 룸의 분위기 변화와 늦은 시간 때문에, 우린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난 조용히 샤워를 마친 후 그대로 잠들었다.


  새벽에 잠이 깼는데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룸메이트들이 자고 있어서 꼼지락도 못하고, 휴대폰으로 한국의 지인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내 뒤척이다가 지금쯤이면 움직여도 되겠다 싶어 일어났다. 침대마다 커튼이 있어서 같은 룸을 써도 서로 얼굴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토마스는 일어났는지, 아직 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리셉션에 갔다가 토마스와 잠깐 마주쳐 눈인사를 했는데, 옆에 리셉션 레이디가 있어서인지 난 어젯밤처럼 흔연스럽게 그를 반기지 못했다. 나는 리셉션 레이디에게 까사 바뜨요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인가를 묻고는, 그곳에 서있는 토마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 와 버렸다.

   오늘 뭘 할 건지라도 물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걸. 난 처음엔 잘하다가도 꼭 이렇게 뒷심이 부족하다.


  샤워를 하고 나갈 차비를 다 마치고 보니, 그의 침대 커튼은 열려있고 침대 위에 소지품들이 흩어져 있는데, 그는 없었다. 난 근처 베이커리에 가서 브런치를 먹고, 한 시간쯤 후에 돌아왔다. 와보니 그의 침대는 정리가 되어 있었고, 짐도 빠지고 없었다. 


  나와 엇갈리면서 포기하고, 그냥 형이 있는 안도라에 갔나 보다. 서운했다. 침대마다 커튼이 있어서 얼굴 볼 기회도 없었고, 내가 샤워하러 가거나 그가 잠시 어디를 나가면, 서로 각자 일정을 향해 나갔나 생각했던 것 같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그날 일정에 대해 먼저 물어보았더라면, 분명 더 좋은 하루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똑같이 망설이고 똑같이 계산하고 그랬던 것 같다. 


  난 그와 함께 돌아다니고 싶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혼자서 카사 바트요와 카사 밀라를 돌아보고 싶기도 했다. 그는 계획 없이 바르셀로나 거리를 돌아다니다 비치에 가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뜻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오랫동안 소원하던 스페인 여행의 첫 그림에 위배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 좋은 출발일 수 있었는데. 난 그렇게 그와 하루를 함께 보내고, 가우디의 건축물은 그다음 날 돌아보아도 됐었다. 


  지금 와서, 아니 그렇게 그가 떠나버린 후에야 그런 후회를 했다. 그 안에는 나의 자신 없음도 한몫했다. 전날 밤 함께 거리를 쏘다니며 난 내가 53세에, 성년이 된 딸들이 있고,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까지 자연스럽게 다했었다. 

  

  그땐 그것이 자연스러웠는데, 다음 날엔 그것이 나의 발목을 잡아 스스로 자신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토마스가 더 이상 그런 나에게 흥미를 느끼지도, 하루를 더 함께 보내고 싶지도 않을 거라고. 당초 계획대로 가까운 곳에 있는 형에게 가서 스키를 타는 쪽을 택하고 싶을 거라고 지레 단정해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동서양과 나이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모두들 비슷하다. 비슷하게 수줍고 비슷하게 자기 확신이 없고 비슷하게 환상과 모험을 꿈꾼다. 상대가 동성이든, 이성이든, 뭐 딱히 어떤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여행지에서 만나, 잠시 여행길에 즐거운 동행이 되어 좋은 경험과 시간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모두에겐 여러 가지 캐릭터들이 내재해 있고, 그 발현의 정도와 형태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분류되기도 한다. 시도해보고 싶은 것을 한 걸음 내디뎌 보았다가 쭉 밀고 나가는 경우가 있고, 지레 그다음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생각만 키우다가 시도조차 못해보는 경우도 있다.

   난 그중 어중간한 부류의 캐릭터가 자주 돌출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뒷심을 키우는 것이다.


  그렇게 허망하게 어긋나 버린 토마스는 늘 궁금하고 한 번은 찾아보고 싶은 사람, 페이스 북에서 검색도 해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한 사람, 그래서 여행 중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늘 얘기하게 되는 사람이다. 

  이후 여행 중에 만나게 된 많은 사람들 중에는, 토마스보다 훨씬 더 가깝게, 더 많은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과는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기도 해서, 원하면 언제든 얘기를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찾을 수 없어서 더욱 궁금하고 아련하고 오래도록 그리운 친구다. 또한 내 여행의 한 순간을 빛내주었던 모든 이들을 묶는, 하나의 파일명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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