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고 지고
어느 궁녀의 한이 서려있다는 능소화는 구중궁궐에서만심을 수 있었다 합니다.
이제는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으우리 모두는전부 귀족인 것입니다.
우리 사무실 주차장 담장 너머에도 한두송이가 피어 빼꼼히 넘겨다 봅니다.
박완서님은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능소화를 두고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 부시게 요염하 꽃" 이라 묘사했었지요.
이태 전, 동생이 구리시 아치울로 이사가고 싶다며 알아봐 달라기에
여기저기 돌아보다 돌아 온 다음 날, 갑자기 아치울 박완서작가님 댁이보고 싶어졌습니다.
출근 전,
들어선 아치울 초입, 어느집 담장의 능소화가 저를 맞아 주더군요.
사진찍기 싫어하는 저를 내리게 하여 기어이 사진을 찍게 만든 집
그 집의 담장아래떨어져 있던 능소화 입니다.
아치울 초입. 그 집의 담장을 능소화는 오늘도 이렇게 피어 있겠네요.
아치울..하면 생각나는 분이, 저는 박완서님입니다.
아치울 마을의 거의 끄트머리쯤에 자리잡은 노란벽의 집은
위압감을 느낄정도로 잘 꾸며진 고급주택이 아닙니다.
그저,가주하시기에 불편함 없이 개성 개풍군 박적골 고향마을과 비슷해서
터를 사고, 집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 집에서 남편과, 서울대의대를 출신의 아들을 갑작스레 잃고,
그 참척의 슬픔을 <한 말씀만 하소서>에 처절하게 기록했습니다.
일년 동안 거의 밥을 잡수지 못했다 합니다.
고통이 깊어 밥을 거부하는 몸을 치유한 곳은 이해인 수녀가 계신
부근의 어느 수녀원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을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참아 주었지만
88올림픽이 그대로 열린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해에 저도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세상이 무너지는 상실감에 부대끼는데도 해는 지고
새 날은 오고, 저는 배가 고파오고, 잠이 쏟아지고 차들은 아무일 없이
잘 굴러 가고 그러더군요.
그리고 저는 교회신자이길포기했더랬습니다.
옛날 안기부 터의 안기부장 관사는 현재 문학의 집으로
변했습니다.
그 곳에서 생전의 박완서님의 강연을 들었더랬죠.
맨 앞자리에 앉아서.....그것도 금아 피천득선생님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말입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옆에서 누가 부축해 드리지 않으면
거동이 힘드셨는데도 한치 흐트러짐없는 옷매무새며
깔끔한 태도로 앉아 계셔서 제가 참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그 분의 수필마냥 한 점군더더기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이 가시기 전에 봬야 한다며 사인을 원하는
독자들의 기나긴 줄을 아쉬어 하던 박완서 선생님이 생각이 납니다.
순박한 모습과는 달리 당찬 문체의 근원을 저는 그 분의 야무진 두상에서
찾았습니다.
사진에서는 안 나타나는 심한 앞뒤 짱구머리..영특한 인상을 주는..
그렇습니다. 그 분의 두상이 요즘 아이들 모양처럼 독특하게 예뻤습니다.
그 고집스런 문체와, 깔깔한 성격의 주인공 묘사는 바로 선생님의 빈틈없는
마음자세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생한 현실적 묘사를 그 분의 두상에서 찾는 것이좀 무리인가요?
선생님이 안 계신 집 골목을 밖에서 한참이나살피며서성이다,
한 장의 사진도 찍을 수 없었던 이태 전. 그날의 아침을 생각해 봅니다.
어느 하루의 보통 일상이 추억이 되어 가는 세월입니다.
올해는 박완서 선생님이 가신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박완서선생님과 동갑이신 저희 어머님은 오늘 아침, 우리집 건너편 창고 옥상에 계셨습니다.
투명하게 빛나는 아침 가을햇살아래 작아지는 몸피를 쭈그려, 고추를 고른 간격으로
배열하고 있었습니다.고추를 심고, 따고, 말리는 정성이 글을 쓰고, 사유하는 일보다 하찮다고
어찌 말할 수가 있을까요.
찬바람 일고, 능소화가 힘을 잃어가는 계절에도 꽃과 함께 얽힌 기억들은 가을의 속살처럼
영글어만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