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륵. 전혜린번역
낮이 기울고 밤이 깃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근심 모르고 편히 쉬기도 했다
그윽한 평화가 지배했다.
밤의 고요가 살며시 밀려왔다. 집집마다 연기가 오르고, 회색 지붕들은 하나씩 저녁노을 속에 잠겨갔다.
다만 높은 산봉우리만이 아직도 하늘의 푸름 속에서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슬프게 하였다. 다시금 낮이 지나고, 이제는 신비의 밤이 둘러싸나 보다 하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어린 미륵은 해주의 남문으로 산책을 나가서 날이 저물어 가는 풍경을 저토록 아름답게
표현했다. 곁에는 물론 수암도 함께 있었다.
운무가 허리를 휘감은 앞산은, 옅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고즈넉했다. 격자무늬 문을 양편으로 젖혀놓고 그 사이로 난 공간을 유리로 가로막아놓은 방 안에서 저녁을 먹었다. 며칠 쑥대밭 같던 머리가 편해졌다. 밤안개에 싸여 귀가하는 길에 해심 씨를 생각했다. 그녀는 오늘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1개월간의 격리 기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집은 중국 길림이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다가 마음이 적막해진 나는 무작정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며칠 전의 일이다. 그녀는 오늘 중국으로 간다고 했다. 백신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내게 중국에서 맞겠다고 대답했다. “자기네 집에서 압록강은 멀어?” “응, 언니, 멀지. 애 아빠 고향에선 가까워.” “어딘데?” “연길.”
서울대 의대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연루된 미륵은 어머니의 권유로 이 땅을 떠나야 했다. 무장한 병정들의 눈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는 날은, 달 밝은 밤이었다. 달빛이 밝은 날은 경비가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륵은 그렇게 중국을 거쳐 독일로 갔다. 그가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 책을 덮고 중국 여인 해심 씨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에게서 ‘미륵’이 건넌 압록강의 형상만이라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길고 긴 강’이라고 했다.
중국과 경계를 이루며 구불구불 흐르니 직선거리로 400km, 강의 길이는 803km에 이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은 틀림없다. 鴨綠(압록)이란 명칭은 강의 물빛이 푸른 오리의 머리빛을 닮았다고 해서 유래되었단다..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곡성의 압록(鴨綠)도 같은 한자어를 쓴다. 그곳의 물빛이 압록강을 닮았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남쪽 어딘가에 ‘압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사뭇 새롭다. 소설가 윤대녕은 어느 글에선가, '보성강은 압록에서 몸을 섞는다'라고 했다. 선비 같은 모습의 고아한 미륵이 건넌 압록강이 멀듯, 남쪽의 압록도 아득하긴 마찬가지 아닌가!.
이미륵은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소작농을 거느린 지주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훈장을 두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미륵의 사촌 ‘수암’은 미륵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미륵의 집에 기거하게 된 수암은 공부에 흥미는 없지만, 식모방의 꿀을 훔쳐먹고, 글씨 연습용 습자지를 몰래 사용해 연을 만들며, 아버지 사랑방에 들어가 독약을 먹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미륵의 아버지가 두 아이의 종아리를 때릴 때, 미륵은 잘못이 없다고 변명해 주는 대장부 기질의 ‘수암’이다. 고모가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칠성이와 함께 살게 되자, 미륵과 수암과 칠성이 사이에 흐르는 알력과 질투는 얼마나 유쾌하고, 귀엽고, 고소한지 행복한 동심원이 겹겹이 펼쳐졌다.
세 아이가 놀음을 한다. 윷놀이로 관직 놀이를 하는 것이다.
점수를 많이 얻지 못하면 관리직을 얻지 못하고 추방을 당한다. 수암은 자주 추방되었고 그때마다 부아가 나서 날뛰었다.
특히 ‘칠성’이 추방을 할 때 더욱 심했다. 그리고 세뱃돈으로 받은 엽전을 다 잃었다. 미륵도 잃었다. 수암과 칠성이 치고받고 이 구석 저 구석 뒹굴며 싸웠다.
아버지의 심판은 칠성은 무죄. 미륵과 수암만 매를 맞아야 했다. 수암은 순순히 응했으나, 미륵은 끝까지 반항하다 더 많은 매를 맞았다. “더 때려!” “ 뭐라고?” 아버지는 소리치면서 다시 나를 때렸다. 수암은 말리다 못해 아버지 손에서 매를 빼앗아 도망치고 만다.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서당의 문을 닫아야 했을 때, ‘수암’의 고전적 교육을 위해 둘은 이별을 해야 했다. 수암이 가는 곳은 미륵의 아버지 농장이 있는 마을이다. 수암의 어머니는 그곳의 농장 경영을 맡기로 했다. 이들은 이렇게 헤어졌다. 나는 ‘수암’이 그리웠고, 그들이 다시 만날 시기는 언제일까 기대했지만 끝내 ‘수암’의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과 여섯 달 먼저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으로서 미륵을 감싸주는 어린 수암의 갸륵함이 나는 내도록 훈훈하고 흐뭇했다. 의리 있는 사나이 수암, 불의를 못 참는 수암, 이웃 동네 아이들과 돌은 던지며 싸우는 수암을 미륵은 잊지 못했을 것이다. 하여, 최우수 독문 소설로 선정되고, 독일 교과서에도 수록된 <압록강은 흐른다>의 첫 시작은 <수암>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미륵의 나이 열세 살, 함께 옥계천으로 물놀이를 다녀온 날, 오래오래 살겠다던 아버지의 맹세는 그날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의 점령과 함께 시작된 새 학문은 미륵에게 힘겨웠다. 어머니는 미륵을 소작농지가 있는 포구 송림마을에 머무르게 하기도 했다.
여기는 좁은 만 灣 밖에 있고, 내 앞에는 무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바다와 하늘이 멀리 수평선에서 서로 닿아 있었다. 서녘에는 가을의 맑은 공기 속에 바위가 많은 연평도가 자리 잡고 있었고, 북쪽으로는 멀리 가느다란 사안紗岸이 낮은 언덕을 둘러싸고 있었다. 멀리 어느 곳에서도 배 한 척 볼 수 없었다. 다만 찬바람만이 젖은 굴 바위를 간간이 스치고 지나갔다.
미륵이 앉아 낚시를 하던 포구에서 연평도가 보인다고 했다. 그는 어디쯤 앉아서 연평도를 바라보았을까! 연평도를 기준 삼아 그가 앉아 바라보았을 지점을 찾아보았다. 나의 오른 편에 강화도가 보이고, 연산군이 유배된 교동도가 보인다. 미륵은 어디에 앉아 있었을까! 집을 떠나왔으며, 학교 친구들은 멀리 있고, 아버지까지 여윈 미륵의 심정을 어루만져 주는 것은 밤바다의 찬바람뿐이었다.
기나긴 항해 끝에 독일에 정착한 미륵은 나중에 전혜린이 유학을 간 뮌헨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 생물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한학과, 한국 문학을 강의했다. 1946년에 발표한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문단에서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미륵이 독일에 도착 한지 5개월 후,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누나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전혜린이 한국 여성 최초로 독일 유학을 갔던 시기에 미륵은 고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의 묘에 참배하다가 고국에 그의 글을 알리고 싶어 <압록강은 흐른다>를 변역했다고 한다.
네가 학교에서 충분히 제주가 없더라도 괜찮아! 우리들에게 그렇게까지 서투른 문화는 맞지 않는 거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아라. 너는 얼마나 쉽게 고전이며 시를 배웠니! 넌 총명했단다. 너를 괴롭히는 새 학교에서 나오너라.
이렇게 현명하고, 자애로웠던 어머니는, 미륵이 독일 하늘 아래에서 달리아와 황혼빛 꽈리를 보며 고향을 생각하던 가을날 세상을 떠났다.
12 살에 혼인한 여섯 살 연상의 아내와, 아들의 이야기는 없다. 그리움의 한 톨도 내비치지 않았다. 한 국가의 안위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비극의 탄생에 일조를 하는지가 이 책에 먹향처럼 배어 있다. 격조 높은 문장 위에 번지는 가문 좋은 도련님의 향기는, 타국에서 번지는 꽈리빛처럼 쓸쓸하다.
미륵의 마음이 묻어 있는 행간에는, 창호문을 통해 한 번 굴절되어 부드러워진 햇살이 보인다. 햇살을 거슬러 따라가 그의 마음을 엿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리라.
전혜린은 그가 한국전쟁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게 다행이라고 썼다.
그의 이름이 우리 가슴속에 강물로 흐르듯
오늘도 소리 없이 압록강은 흐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