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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쿠아마린 Sep 15. 2021

여성이라는 이름의 그늘들-최은영의 쇼코의 미소

나의 은밀한 서가

여성이라는 이름의 그늘들-쇼코의 미소 중 <언니, 나의 작은, 순애언니>


1975년 그는 서울을 떠나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손수 지어 치열한 수행에 들어갔다.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여 엄격한 규율 속에 자신을 담으며 후박나무 아래서 명상을 하였다.부처님 얼굴 같은 자비스런 표정의 후박나무 잎이 드리운 땅 위에는 그가 손수 만든 거칠고 투박한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가 그곳으로 떠나간 계기는 1974년의 인혁당재건위 사건때문이었다.그는 불교계에서 외롭게 민주화투쟁에 동참한 사람이었다. 그는 법정스님이다.


           <후박나무아래의 법정스님 의자>


인혁당 사건은 1차, 2차가 있다. 1차인혁당 사건은 1964년 중앙정보부장의 발표로 알려졌다. 

북한의 지령에 의해 조직된 지하조직이 국가전복을 계획한 인민혁명단 사건을 적발했으며, 일당은 57명이며 41명을 구속했고, 16명을 수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 후 10년이 흐른 1974년에 유신반대투재을 벌이던 민청학련을 수사하던 중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재권위를 지목하면서, 이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이라고 규정했다.이것이 2차 인혁당사건, 즉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다.75년 2월 이철, 김지하등 민청학련 관계자등을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75년 8월 인혁당재권위 관련자 8명은 사형확정선고를 받은 지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유족들도 알지 못하게 화장을 해버렸다. 고문시비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유없이 죄인으로 몰린 한없이 착한 이땅의 민초들이 있다. 이데올로기 대립과 권력의 유지를 위해 가차없이 휘두른 눈먼 휘두름에 무참히 허리가 잘린 우리의 이웃들, 그 안엔 우리의  이모와 고모가 있다. 무엇이 저항인지도 알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서늘한 이웃들은 늘 그런 사람들이었다.


최은영 소설의 화자는 여성이다. 그는 여성의 위치에서 여성의 시각으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썼다.

그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 수록된 <언니, 나의 작은, 순애언니>를 읽었다. 내 볼 위로는 남해 다랭이 논의 논두렁 같은 눈물길이 나 있었다. ‘나의 작은’을 되뇌이니 논두렁같은 눈물길 위로 새로운 물줄기가 흘렀다.

사람이 운명을 하면 그리운 사람에게 잠시 환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나는 사춘기시절 펄벅의 <북경에서 온 편지>를 통해 알았다. 할머니의 옷수선일을 도와주러 온 할머니의 이종사촌언니의 딸을 화자의 엄마는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라는 말의 울림이 좋았던 엄마 해옥은 언니라는 말이 안착하는 대상, 순애언니가 좋았다. 


동네의 열여섯 살 먹은 소녀 중 가장 작은 순애언니. 순애언니는 왜 이리 작았을까. 열한 살 먹은 화자의 엄마보다 작은, 가엾고 애달픈 한 마리 들짐승 같은 순애의 운명이 어떻게 펼쳐지리라는 복선 같아서 불길했다.

순애가 키우던 개, 곰이는 그대로 순애의 모습인 것이다. 그녀가 살아 갈 인생의 행로에서 순애는 딱 곰이었다.  그런 이모를 곰이의 눈으로 바라본 화자의 엄마 눈에 순애는 모두를 잃고 나서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던 가련한 사람이었다.


순애언니는 평생을 두고 곰 이야기를 했다. 지겹도록.

'곰은 마지막 며칠 동안 너무 아파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 그런데도 곰아, 부르면 애써서 고개를 들고 꼬리를 치는 거야. 곰아, 밥 먹어. 말하면 곰은 안 아픈 척 밥에 코를 대고 먹는 시늉을 했어. 그런 곰 앞에서 울었어. 곰이 단순히 아픈 게 아니라 죽어간다는 걸 느꼈거든. 한 밤을 지나고 나서 개집에 가니 곰이 사라졌더라. 그애가 사라지고 한 달 내내 울면서 학교를 다녔어. 울고 또 울었지. 내가 괜히 곰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 곰이 집을 나갔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아픈 걸 보고 내가 마을 아파하니까 죽으러 나간 거라고 생각하며 자책했지. 아무리 슬프더라고 내색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울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느 인생에도, 크고 작을 뿐이지 가엾고 작아서   비에 젖은 저 곰이(개) 같은 존재는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그 존재가 부당한 국가 권력에 의해서 무너질 때, 손을 내밀어 어쩌지도 못할 처지라면 화자의 할머니가 엄마에게 쏟던 말처럼,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이것이 정답이었을까!


엄마네 가족에게 찬 대접만 받던 순애언니는 결혼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꿈꾸지만 행복도 잠시, 남편은 북한지령을 받고 지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었다. 가정이 온전치 못해도 순애언니의 희망은 딸이었다. 늘 자랑스러운 딸. 순애언니는 그가 키우던 개, 곰이가 그랬던 것처럼 멀리 떠나와 누구와도 교류를 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며 아파할 사람들을 위한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그녀의 개, 곰이가 그랬던 것처럼...오잭 화자의 엄마만이 가끔 만남을 이어가지만 엄마도 이젠 곰이처럼 죽어가는 순이 이모를 멀리한다. 자신이 상상도 못할 큰 고통을 짊어진 사람을 앞에 두고 그대로 바라보기가 왜 어렵지 않겠는가! 삶의 어느 지점에서 부턴 고통을 공유할 필요조차 없는 집단에 몸을 들이밀고 함께 웃고 먹고 마시며 우리는 살아간다. 엄마가 순애 이모를 외면한 방식이 그랬다. 곁에 두고 바라보기엔 너무도 애잔한 존재. 그리하여 고개를 돌리고야 마는...


한 남자가, 한 여자가, 한 가정이 무너져도 누구 하나 손을 내밀지 못하는 절명의 순간에서 순애이모는 화자의 엄마에게 ,

"항상 이런 건 아니라고. 나 항상 이렇게 사는 건 아니야"

화자의 엄마(해옥)이가 사 간 통닭구이를 펼쳐놓고 먹는데  고문으로 성한 곳이 없는 순애언니 남편에게서 오줌이 흘러 나왔다. 사람의 몸에 저런 물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소변이었다. 통닭이 젖고, 해옥의 옷이 젖어도 남편은 소변을 제어할 길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재판이 끝난 18시간 후에 형장의 이슬로 살아져 화장을 해버린 사람들 보단 나은 형편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나 싶다. 2007년 서울중앙지법은 인민혁명당 재권위원회 사건과 관련된 8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순애언니가 운명을 하던 날, 그녀는 무릎수술을 받은 해옥에게 열여섯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그녀에겐 날개가 있었다. 일생 짊어진 온갖 짐을 다 내려놓은 가벼운 모습의 순애언니는 작은 빛에 실려 높은 곳으로 떠났다. 튼실한 무릎을 위해 인공관절을 넣은 해옥이와 이제는 땅 위에서 자유로워진 순애언니와의 대비는 내 어린 날의 상처를 생각나게 했다(그것도 상처라고 50년이 넘은  세월에도 늘 생각이 난다)순애언니의 곰이가 내게도 있었다. 아직도 아프고 쓰린 우리집 개 이야기다.

그 개가 생각 나서  나는 울고, 순애언니가 가엾어서 또 울었다. 

한낱,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우리집 개를 구해내지 못했다. 집에 있었다 한들, 못난이 개를 구할 방법이 있었을까! 순애언니의 고통은  누구도 나서서 구해줄 수가 없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이토록 부조리 덩어리였다. 


법정 스님이 홀연 서울을 떠나 불임암으로 들어간 이유는 자명하다...

곰이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누구보다 귀한 사람, 순애언니는 다 버리고 가벼워진 몸으로 날아갔다.

잃을 것을 다 잃고 엄지 손가락만큼의 크기로 떠나간 영혼은 눈부셨다.

법정도 입은 옷 그대로 재가 되어 하늘의 티끌이 되었다. 윤회의 고리를 끊고 싶었던 그의 소망이

불임암 후박나무 아래 고요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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