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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Sep 21. 2023

너를 안을 수밖에 없는 온도

 38.5도에서 만난 라벤더 

아이를 낳은 시작부터 돈도, 마음도 아무런 준비 없이 엄마가 되었다는 감정은 죄책감이 되어갔다. 이런 마음은 내 몸은 개의치 않고 아이에게 좋다는 건 다 해주고 싶다는 힘이 잔뜩 들어간 육아 방식을 만들었다. 자연분만을 못했기에 수유만큼은 완모 수유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컸다. 의욕만 앞서고 제대로 할 줄 몰랐던 수유로 젖몸살이 났다. 어깨까지 가슴이 굳어오고 오한이 이는 고통은 차라리 배를 갈라 아이를 더 낳는 것이 덜 아프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가슴은 헐어서 아이가 물고 난 후 유축기로 남은 모유를 짜낼 때마다 피가 줄줄 났다. 피가 나는 만큼 눈물도 줄줄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육아는 현실이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해야 하는 수유로 잠을 못 자는 것은 물론이요, 수술 후 복부에 힘을 쓰지 못해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나는 습관으로 손목엔 건초염을 달고 있었다. 완모수유를 하면 아이에게 좋다고 하여 이렇게 고생고생하며 모유를 먹였는데도 정확히 아이가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잦은 잔병치레를 하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살 때에는 병원이 가까우니 바로 병원을 데리고 가서 급하면 입원을 시킬 수 있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중이염과 인후염을 달고 살던 아이는 습관처럼 항생제를 먹게 되었다. 그러다 안되면 병원에 입원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나의 딸은 어릴 때 잔병치레를 많이 하던 나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 모습을 통해 나를 키우던 엄마의 마음이 어땠는지 느끼게 해 주었다. 초보 엄마였던 나는 그저 아이가 열이 39도가 가까워지면 불안의 불안을 반복하다 응급실로 달려가기 일쑤였다. 응급실에서 우는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엑스레이를 찍고, 가녀린 팔에 바늘을 꽂아서 한 뼘씩은 되는 피를 뽑아내고, 사전 검사들을 하며 보내는 시간뿐이었다.  병원의 입장에선 그 기록이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었다. 그 의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올 때면 혈관을 찾지 못해 몇 번이나 찌르던 주삿바늘이 차라리 닿지 않도록 응급실을 가지 않는 게 나았을까 싶은 죄책감으로 눈물이 났다. 


아이를 낳은 후 아이아빠의 사업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나의 고향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병원이라고는 작은 의원밖에 없는 내가 자란 동네에서 다시 나의 육아는 시작되었다. 도시에 살면서 아이가 아프면 자주 찾던 병원은 이제 갈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병원이 없는 동네에서 가슴 쓸어내리며 키웠듯이 나 또한 비슷한 육아과정이 시작되었다. 병원이 귀한 동네의 작은 의원들은 한 번씩 대기하기 시작하면 두 시간이었고, 내가 일을 하기 시작하고부터는 병원에 앉아 두 시간씩 대기할 시간이 없었다. 한두 시간씩 떨어져 있는 근처 도시의 병원이라도 나가려면 예약된 손님을 모두 취소하고 사업장 문을 닫아야만 가능했다. 조금만 아파도 달려가 대기하는 병원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큰 고생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기다리고도 처방을 받아오는 약의 종류가 늘 한결같음을 반복하고 나서는 나 나름대로 병원을 가는 기준을 정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열이 나는 온도를 점검하여 38.5도가 넘지 않으면 해열제와 집에서 내가 해주는 관리로 면역력을 높여주어 보자는 결정을 했다. 아로마테라피는 그 결정에 큰 힘을 보태주었다. 가지고 있던 책을 펼쳐서 아이가 열이 날 때 쓸 수 있는 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라벤더 에센셜오일을 만났다. 


아이가 인후염으로 열이 날 때면 미온수가 담긴 대야에 라벤더 에센셜오일을 떨구었다. 그 물에 수건을 적셔 짜서 아이의 온몸을 닦아주며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아이가 열이 내리고 난 후에도 사소한 습관은 이어갔다. 아로마 에센셜오일을 담을 수 있는 목걸이에 유칼립투스 오일을 넣어서 목에 걸어 어린이집을 보낸다거나, 베개나 머리맡에 발향을 시켜 에센셜오일을 접하는 일상을 루틴으로 만들었다. 그런 작은 습관은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의 관심표현이었으며 아이는 그 관심의 표현을 사랑으로 받아 예쁘게 자라주었다. 힘들고 바쁜 시간 속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내가 아이에게 뭔가 크고 대단한 것을 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이가 미숙한 엄마를 어른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내가 경기를 할 때 나를 업고 동네를 뛰어 달리던, 내가 열이 날 때 나 대신 본인이 아팠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던 엄마의 마음이 이와 같았을까? 내 아이를 키우며 나를 힘들게 키웠을 엄마의 마음을 되새기게 되던 순간이었다. 


육아를 경험허기 전에 누렸던 늘 하던 일상과, 소중한지 모르고 누렸던 '나'의 본질에 집중하던 행위는 출산과 육아를 시작한 후엔 불가능했다. 온전히 나의 평온함을 유지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육아가 무언가를 잃는 것 같고 나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힘들었던 내 삶을 버티게 해 준 면역력은 나의 딸아이였다. 아마 나 또한 엄마에게 그러한 존재였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해서 아이를 키웠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나의 생각을 키워주고 의지케 하며 그렇게 세상을 당차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존재였다. 


살다 보면 삶의 비바람이 너무 차서 매일매일이 맑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매일매일의 순간이 맑기만 하다면 그곳은 어떻게 될까. 아마 바싹 마른 사막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차가운 눈이 땅을 덮어야 다음계절에 풀이 나고, 꽃도 피고, 열매도 나는 것처럼. 추운 겨울이 있어야 따뜻한 봄도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라벤더에 재미있는 스토리가 스며있다. 1400m 이상 고지에서 자란 라벤더일수록 더 부드러운 향과 뛰어난 치유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비, 바람, 고지대의 험난한 환경 때문이다. 자신이 겪어낸 혹독한 환경을 고스란히 자신의 몸에 치유라는 향기로 다시 만들어 내는 식물의 힘이라는 것이 그저 신비롭기만 한다. 내가 겪은 삶을 녹여내어 만든 마음의 온도는 삶의 추위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온기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을 보면 식물의 삶과 사람의 삶이 참 닮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24살의 내가 43살의 지금의 내가 될 때까지 그 삶을 버텨내는 내내 나의 옆을 지켜준 건 나를 엄마라고 불러주고 믿어주는 내 딸아이의 사랑이었다. 나만 아이에게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과 관심은 그렇게 서로를 살게 하고, 버티게 하고, 살아내게 했다. 엄마는 딸에게 세상이라는 삶을 주었고, 딸은 엄마의 삶을 살게 했다. 더 좋은 것을 주지 못한다고 스스로 많은 자책을 했었지만 본질에 닿는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대단하고 거창한 보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출산과 육아의 경험은 그렇게 사랑을 알게 했다. 내가 아플 때 나의 엄마가 그러했듯 내가 내 아이에게 드러했듯. 우린 그렇게 사랑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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