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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Sep 20. 2023

너를 안을 수밖에 없는 이유

엄마가 되다

1980년대, 우리 엄마 나이 37살에 늦둥이 딸아이가 태어났다. 그 시절 시골동네에서는 30대 후반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건 동네방네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엄마 아빤 나를 낳지 않으려고 병원예약을 해 두었다고 한다. 워낙 시골이라 차를 타고 도시 병원까지 나가는 길이 험하여 차일피일 미루다가 수술 시기를 놓쳐 지우지 못해 어쩌다 태어난 아이가 바로 나다.


병원이 없는 시골에서의 임신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삶의 기회를 주었지만,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기게 했다. 양수가 터졌는데도 '오늘, 내일 내어나겠지'라고 생각하고 7일이나 방치했던 일화는 지금 들어도 아찔한 내가 태어난 에피소드이다.


첫 돌이 지나고 내가 젖도 떼기 전에 엄마는 자궁에 물혹이 크게 생겨 자궁을 적출해야 하는 수술을 하셨다고 한다. 지금이야 의술이 발달하여 물혹 정도는 큰 수술도 아닌 시술 정도이지만, 병원 시설도 변변치 않았던 80년대 초반엔 자궁에 물혹이 생기면 지금의 암처럼 심각한 병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궁을 적출하는 수술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한다. 그 수술로 엄마와 겪은 생이별은 아마도 돌 지난 아이에겐 큰 트라우마가 아니었을까.


"그때가 아마 한 겨울이었을 거야. 엄마가 말이야 돌쟁이인 너를 업고 수술 하루 전날 망연자실해서 하늘을 바라보는데 눈이 참 예쁘게도 오더라. 그때 문득, 종교도 없던 내가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만약 신이 있다면 내가 수술 후 살아 나와 지금 내 등에 업혀 있는 이 아이를 다시 잘 키울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렇게 울었어. 이 젖먹이를 두고 나를 거둬가면 이아이는 엄마 없이 어떻게 사냐고. 이상하게도 네 언니와 네 오빠는 그래도 12살이 넘었으니 걱정이 되지 않더라고. 그런데 등에 업힌 너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그렇게 하늘이 원망스럽더라."


철부지 젖먹이가 뭘 알았을까? 우는 것밖에 할 줄 몰랐던 아이는 목놓아 울고 또 울며 엄마를 찾았다고 한다. 수술하는 동안 나를 업고 있는 외할머니가 나를 달래고 댈래도 얼러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한다. 결국, 수술을 마치고 나온 엄마가 생사를 오가는 와중에도 수술한 배 위에 얹고 있던 모래주머니를 치운 후 엎드려 등에 나를 올려놓고 잠을 잤다고 한 이야기는 아직도 두고두고 엄마가 이야기하는 내 어릴 적 일화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허약해서 잔병치레를 많이 해 엄마 속을 애태웠던 이야기도 엄마가 이야기하는 단골 육아 에피소드이다.


"한 번은 너를 등에 업고 있는데 갑자기 애가 사지가 뻣뻣해지면서 굳어지더라고. 세상에 놀라서 달리고 달려도 길은 그 자리고 또 그 자리고, 마음은 급하고 버스도 하루 몇 번 다니지 않는 시골 마을에 무슨 대단한 병원이 있었겠나. 그래도 내가 그 길을 뛰고 또 뛰어서 그때 당시 '자애의원'이라고 불리는 작은 의원으로 달려갔는데, 병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떤 사람이 말을 걸더라고. 애들 경기할 때는 주삿바늘 잘못 찌르면 큰일 난다고 안 하나. 저기 시장 안에 있는 한약방을 알려주며 그 아저씨가 침술로 유명하니 얼른 데리고 가라고 알려주더라고. 그래서 냅다 들고뛰어서 다시 시장으로 갔지. 그때 내가 뭔 정신이었는지 기억도 잘 안다. 그 한약방 아저씨가 너를 여기저기 침으로 다 찌르다가 애가 반응이 없으니까 코와 인중 사이 그곳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더라고. '여기 찔러도 안 깨어나면 못 살립니다. 애 죽어요' 하는데 세상에 어느 엄마가 제정신이겠나. 근데 세연아 있잖아? 거기 코하고 이중 사이를 침으로 딱 찌르자마자 시퍼렇게 질려있던 네가 '와앙'하고 울기 시작하는데 그제야 엄마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지 뭐나."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나는 참 어릴 때부터 엄마를 너무도 고생시킨 일등공신이었던 것 같다. 나의 기억에도 그렇다. 내 기억이 머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는 잔병치레를 많이 했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그때마다 나를 괴롭혔던 병은 편도선염이었다. 감기만 오면 늘 편도선이 부어서 열이 올랐던 난, 걸핏하면 학교에 가지 못했다.


엄만 열이 펄펄 나는 조그마한 나를 업고 길을 걸으며,

"이번에 아픈 거 다 낫고 나면 엄마가 바비인형 사줄게. 먹고 싶은 거 없어? 아픈 너를 보니 차라리 엄마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곤 했다. 난 늘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우리 반에서 바비인형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형 부자였다. 허약해서 먹는 것도 시원찮던 내가 한참 열과 한판 사투를 끝내고 나면, 우리 집 형편에는 정말 비쌌던 한 개 천 원짜리 바나나와 통조림 파인애플을 사주었다. 엄마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꼭 하나를 사서 나만 먹였는데 그런 엄마를 보며 그때 난, 정말 엄마가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다.


한평생 자식만 바라보고 버티며 살아온 엄마의 인생. 그 곱던 얼굴이 주름으로 가득해지는 지금의 연세까지 살아오며 크고 작은 삶의 굴곡 앞에서 엄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꿋꿋했다. 16년 전 본인의 큰 딸을 가슴에 묻고 마음을 쓸어내리는 긴긴밤이 엄습했을 텐데도 10여 년을 한 번의 흔들림 없이 남은 손주들과 자식들 챙기시며 버틴 강인한 여성은 또 다른 한 사람의 강인한 여성을 길러냈다.




대외활동에 관심이 많던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정치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집안의 가세는 빠르게 기울기 시작했다. 십 수년을 그렇게 지내며 집은 경매로 넘어가는 수순을 밟기 시작했고, 내가 원하는 공부와 진로는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그렇게 집안의 몰락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나는 마음고생하는 엄마를 보며 절대로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강한 부정은 그 이면에 또 다른 약한 모습도 가지고 있다. 아빠로 인해 만들어진 그릇된 결혼관은 아빠와 다른 성격의 사람이 나타나자 가난과 고생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때의 난 내 삶을 내가 책임지기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학시절 가세가 기울어 아르바이트로 생활전선을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그때 만난 아이아빠는 피난처였다.


원하는 전공을 하지 못했다고, 집안이 몰락했다고 상심해 있던 나는 어떠한 도전도 원하지 않았다. 나의 성취와 도전이 아닌 사회적 시선을 이미 얻은 신랑 될 사람의 안정적 직업에 의지해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던 내가 했던 선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뒤로 미룬 채 아이아빠의 일을 전적으로 도와 돈을 버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아이가 생겼다. 7주가 지날 때까지 어떠한 검사에도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은 아이. 양쪽 집안 모두 몰락의 궤도에 올라 있었고, 아이 아빠의 사업 또한 대출만 끼고 시작했었기에 모두가 나의 임신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렇게 난 누구에게도 축하받지 못하는 임신을 했다. 가족들 앞에선 지금 이런 상황에 애부터 생긴 대책 없는 철부지였고, 친구 지인들 앞에선 혼전 임신이라는 소문이 날까 두려워 전전긍긍했다. 뒤늦게 나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언니와 형부가 결혼식을 강행함으로 출산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한평생의 기억으로 남을 나의 결혼식을 마무리했다. 임신 기간 축하받지 못하는 과정을 겪으며 자연스레 아이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미안함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남들이 좋다고 하는 모든 것을 다 해주기 위한 나의 억척스러움의 기반이 되었다.


태어나는 아이에게 좋다고 하여 자연분만을 고집하다가 이틀 동안 유도분만을 했는데, 실패했다. 진통은 최고수치까지 올라갔지만 내 골반이 작아서 아이는 내려오지를 못했다.


"세연 씨, 지금 들어간 저 산모가 키가 170에 아이가 3.8kg 이에요. 근데 지금 세연 씨 체구 봐 봐. 아이 무게는 3.8kg으로 같은데 이렇게 무리하면 낳고 나서도 자궁 무력증이 와. 지혈 안되면 문제 생겨서 응급실 갈 확률이 높으니까 수술합시다. 우리"  선생님은 나를 설득했고, 난 그렇게 수술대에 올랐다.


추운 회복실 마취에서 깨자마자 난 아이부터 찾았다. 간호사 둘은 후처치를 하느라 내 배를 누르고 있었는데 난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의 손을 잡아보았다.


"아가야, 엄마야."

그렇게 나도 나의 엄마처럼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계획 없이 한 결혼도, 임신도 그 모든 선택이 나에게 서러움으로 다가왔지만, 아이만큼은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키우며 준 사랑은, 내가 내 아이를 안고 다시 사랑으로 태어나게 하고 있었다.

그 해는 24살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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