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어장이라는 집안에서 ‘무릎팍도사’는 적자였고 ‘라디오스타’는 언제 쫓겨날지 모를 서자였다. 10분에서 20분 방송하는 것도 서러운데 가끔 ‘무릎팍도사’에 밀려 5분 방송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MC들은 당시에 비호감이었던 김구라, 황금어장에서 계속된 코너 실패의 맛을 봐야 했던 신정환, 예능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동과 윤종신으로 이루어졌다. 아무도 라디오스타가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 못했다. 오죽하면 클로징 멘트가 “다음 주에 만나요~ 제발” 이었을까. 하지만 현재 MBC의 최장수 예능으로 그 자리를 지킨 것은 5분 예능이라는 굴욕과 찬밥 신세를 견뎌낸 서자 ‘라디오스타’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김연아에게 밀려 5분 방송을 하게 된 ‘월드스타’ 비(깡). 심지어 그 5분마저도 비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비 이야기 없는 비 편. 정말 웃긴 건 5분방송임에도 불구하고 마무리까지 알차다. “제 번호판이 마5에 아사아사” 신정환의 미친 애드리브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게스트들을 섭외했지만, 자기들끼리 웃기려는 욕심에 게스트는 뒷전인 막장진행,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MC조합, 20분도 겨우 나가면서 가끔은 ‘무릎팍도사’에 밀려 5분씩 방송되는 이 ‘근본 없는 쇼’의 ‘근본 없는 진행’은 프로그램의 치명적인 약점인 것 같았다. 하지만 라디오스타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했던가. 언제 끝날도 이상하지 않았을 이 프로그램은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무자비하게 서로를 물어뜯는 진행방식, 게스트보다 MC가 더 떠드는 ‘주객전도 토크쇼’를 무기로 내세웠고, 이는 기존의 토크쇼와는 확실히 다른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일반적인 토크쇼에서는 말하기 좀 꺼려지는 게스트의 논란거리나, 기피하는 내용을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었다는 점이 효자손처럼 시청자들의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주었다. 게스트들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이 무례함과 짓궂은 태도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B급 프로그램의 가장 큰 무기이자, B급이기에 용인될 수 있는 핸디캡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약자로 자처했다. 무릎팍도사에 얹혀간다는 점을 자꾸 언급하며 라이벌 의식과 자격지심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태도는 암묵적으로 용인될 수 있었다. 이같이 앞뒤 가리지 않는 진행방식 때문에 자칫하면 중구난방으로 진행될 수 있는 그들의 독한 토크쇼는 김국진의 섭외를 통해 중심을 잡았다. 이때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라디오스타의 정체성이 시청자들에게 기억됐다. 다소 차분한 이미지의 김국진이 라디오스타의 매운맛을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는 엽기 떡볶이 속 치즈같이 매운맛을 잡으면서도 그 풍미는 깊게 만들었다. 오히려 김국진이라는 선을 정해주었기에 그 선 안에서 다른 MC들은 서로가 조화를 이루고 각자의 캐릭터가 명확해졌다.
MC들 진행수준 진짜 실화냐? 진짜 세계관 최강자들의 진행이다….
김국진이 첫 등장한 이 회를 시작으로 ‘막장’이라는 이미지와 라디오스타의 4인체제가 시청자들에게 각인된다. 덕분에 연속 5회 방심위의 경고를 받는 기록을 세웠다. (김국진은 이날 결국 김구라의 멱살을 잡는다.) 그래도 얼마나 웃겼으면 아직도 라디오스타하면 13년전의 4인체제가 떠오를까. 2007년 MBC 예능대상은 무한도전이 받았지만 내 마음속 대상은 라디오스타였다.
B급으로 시작했던 라디오스타는 MC들도 프로그램도 모두 A급으로 자리 잡았다. 라디오스타는 출연만으로 화제가 되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고 MC들은 더 이상 자기비하 개그를 하기에는 애매한 ‘성공한 연예인’이 되었다. 이들의 게스트에 대한 무례하고 짓궂은 태도는 B급의 자격지심이 아닌 A급의 폭력이 되었다. 2017년 김구라는 김생민의 절약을 자린고비로, 성실한 생활을 피해의식으로 몰아가며 조롱했다는 논란에 휩싸였고 분노한 시청자들은 김구라 퇴출 서명 운동을 벌였다. 또한 최근에는 동료 개그맨인 남희석이 김구라의 캐릭터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또 한번 논란이 일었다. 제작진은 상황을 재미있게 풀어나가기 위한 김구라란 캐릭터에 대해서 시청자들의 이해를 부탁했다. 물론 옛날이었으면 비슷한 처지끼리의 독설이나 가벼운 콩트 정도로 여기며 유쾌하게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김구라는 이미 시청자들에게 권력자로 여겨지고 있다. 시청자들이 느끼기에 라디오스타가 게스트를 바라보는 눈높이가 예전처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 내려다보는 것이 된 것이다. 이제 김구라의 날카로운 독설과 눈빛이 모니터를 넘어서 시청자들에게 불편함으로 다가온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라디오스타의 성공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독한 토크쇼’라는 무기가 성공한 라디오스타에는 오히려 자신을 겨누는 ‘독’이 되었다.
유순해진 방송 진행과 비교적 온순하게 바뀐 김구라의 캐릭터, 윤종신의 부재 등 라디오스타의 많은 부분이 변화했다. 더 이상 예전의 매운맛을 찾아보기 힘든 라디오스타는 그 색깔을 잃어버린 채 평범한 토크쇼로 전락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이 비판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다. 뚜렷한 색깔 없이 화제 되는 게스트를 불러서 평범한 질문만 오가는 라디오스타는 예전 라디오스타의 영광에 힘입었을 뿐 일반적인 토크쇼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예전의 B급 감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들이 시청자들에게 줄 수 있는 매운맛은 더 이상 맛있게 매운맛이 아니라 혀가 얼얼하기만한 아픈 매운맛이기 때문이다.
과거 라디오스타의 핵심무기인 B급 감성을 잃어버렸다면 ‘고품격 음악방송 라디오스타’의 위치에 걸맞은 새로운 A급 감성을 재정립해야한다. 김국진은 여전히 메인 MC로서 진행의 중심을 잡고 있고, ‘순한 맛 김구라’는 여전히 조곤조곤 팩트로 게스트들을 당황하게 하며, 안영미는 방송 수위를 넘나드는 19금 개그로 라디오 스타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중이다. 제작진들 또한 게스트 MC를 통해 끊임없이 라디오스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라디오 스타는 원래의 색깔은 잃어버리기 보다는 시대의 흐름과 공영방송의 책임자로서 새로운 색깔로 변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독한 토크가 무기였던 그때 그 시절 ‘라떼’의 라디오스타를 잊지 못하고 색깔을 잃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색깔을 대체할 라디오 스타의 새로운 정체성이 시청자들에게 확립되지 않아서이다. 라디오스타는 하루빨리 빈자리로 남았던 고정MC를 섭외한 뒤 4인 체재의 완전체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시청자들에게 그 정체성을 각인시켜야 한다. 더 성숙하고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라디오스타로 거듭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