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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iel Jul 19. 2020

'빈곤'을 입체적으로 그리다

영화 <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

'빈곤 포르노'라는 말이 있다. 빈곤문제를 미디어 속에서 자극적으로 표현하여 연민과 함께 기부를 장려하는 행태를 꼬집어 나온 말이다. 그나마 요즘은 좀 나아지는 듯 하지만 (적어도 SNS상에서는), 한국 TV에서 보통 보이는 빈곤의 모습은 정말 가히 포르노 수준이다. 빼빼 마른 아이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빤히 카메라를 쳐다보거나, 갈빗뼈가 드러난 갓난아이가 젖을 먹고 있거나. 물론 후원 중요하고, 그들을 후원하는 건 개인의 자유다. 다만 나는 빈곤을 팔아 개발협력사업을 이어나가는 방식이 못마땅할 뿐이다.

 

아프리카와 빈곤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아프리카와 원조 관련 저명한 책 <죽은 원조>에 언급된 것처럼, 사람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가 빈곤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빈곤 포르노는 빈곤의 원인이나 구조적인 맥락 등  빈곤문제의 본질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고, 빈곤을 이미지화하여 결국 특정 지역과 문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경험을 만들어낸다.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가 가난하지는 않으며, 모든 지역과 모든 사람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지는 않다. 특히 모든 빈곤국 사람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절망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넷플릭스 영화 <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은 빈곤문제를 가족단위, 마을단위, 외부자본, 정부 체제 및 정책, 교육 등 사회 전반을 입체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여주는 너무나도 여운이 남고 반가운 영화였다.


영화의 배경은 기근이 닥친 말라위의 어느 마을이다. 주인공 윌리엄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학교에 다니고 있으나, 몇 년째 닥친 기근으로 마을뿐만 아니라 온 지역 사람들이 한숨을 내쉰다. 거기다가 기근이 닥친 틈을 타 외국인 자본가들은 헐값에 땅을 매입하려 마을 사람들을 찾아간다. 족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먹을 게 없는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서명하여 땅을 넘긴다. 나무가 베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인 담배농장 땅을 잃어간다.


당장 내일 식량이 부족해진 사람들은 마른땅에 괜히 땅을 일러보고, 교육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은 하나둘 학교를 떠나가며 대학 진학과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은 점점 꺼져간다. 윌리엄 역시 교육비를 내지 못해 눈치 보며 겨우 수업을 듣지만, 교육비 미납으로 인해 도서관 카드가 없어 원하는 책을 보러 가지 못한다. 윌리엄은 누나와 연인 관계인 학교 선생님을 협박하여 도서관을 겨우 들락거리 이용할 수 있게 되지만 교육비 체납이 계속되자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고 만다. 학교에서 쫓겨나 어깨가 축 처진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윌리엄을 본 윌리엄의 엄마는 온 가족을 데리고 학교로 찾아가 교장선생님과 담판을 짓는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을 내쫗은건 내가 아니라 정부이며, 학교 운영의 문제도 지역 전체의 문제라며 선을 긋는다. 윌리엄의 엄마는 이에 '나는 남편과 결혼할 때 우린 절대 선조들처럼 기우제 따위 지내지 말자고 약속했다. 우린 현대인이니까. 그런데 지금을 내 남편은 아이들을 위해 굶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선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함께였기 때문이다'며 교장선생님에게 일침을 가한다. 결국 교장선생님은 뭘 해주면 좋겠냐고 되묻고, 윌리엄은 도서관에 가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윌리엄 엄마가 말하는 '우린 현대인이니까'은 먹먹하면서도 아이러니하다. 마치 현대사회에 들어서도 현대문명의 혜택과는 멀리 떨어진 저개발국 빈곤층 모두를 대변하는 듯하다.


또 하나의 명장면은 마을대표(족장)가 정부 관료와 마을 주민들이 함께하는 연회 자리에서 연설하는 장면이다. 족장은 '우리는 이 정부가 매우 잘할 것을 믿고, 나는 이 정부에 투표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의 기근 문제를 고려치 않고 해결치 않는 정부라면 투표하지 않겠다'라고 소신을 밝히는데, 결국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고 표현의 자유가 있다'는 말을 남긴 채 마이크를 뺏기고, 뒷무대에서 무자비하게 폭행당한다. 이 장면은 많은 저개발국 정치체제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없는, 투표권의 자유가 있지만 제한된, 민주적이지만 억압적인 구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개입에 대한 방법은 긴 숙제이다. 세계은행, IMF, UNDP, UNICEF 등 UN 산하기구를 포함한 다양한 국제기구, 지역기구, 국가들이 다자협력 또는 양자협력을 통해 저개발국의 개발에 관여해왔고, 이를 통해 어마어마한 자본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빈곤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빈곤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두 관점에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거버넌스의 차원에서의 비효율성, 비 효과성이다. 대부분의 차관과 원조는 정부를 통해 전달되는데, 거버넌스가 건강하지 못할 경우 전달된 차관과 원조가 국가의 발전에 쓰이지 못한다. 특히 빈곤층에 닿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다. 세계은행과 IMF는 이에 대응해 원조에 '건강한 거버넌스'라는 조건을 붙여, 투명하고 민주적인 거버넌스를 구축해 나가도록 유도하고 있으나 사실 조건부 원조의 효과성에 대한 담론은 계속되고 있다. 저개발국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거버넌스를 가진 경우가 많고 원조에 조건을 붙이는 것 자체가 결과적으로 보다 나은 상황의 국가에 유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 배경인 말라위도, 원조나 차관의 투입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근에 허덕이는 마을에 돌아온 건 무관심, 통제, 폭력이었다.


둘째, NGO와 시민사회의 관점이다. 옥스팜, 세이브 더 칠드런, 월드비전 등 크고 작은 국제 NGO들이 저개발국의 사회 곳곳에서 많은 원조 활동을 해오고 있다. 투입되는 자원의 규모가 국가나 국제기구만큼의 규모만큼은 아니지만, 저개발국 마을 곳곳에 녹아 정부의 빈틈을 채워줄 수 있는 이상적인 대안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NGO 활동은 빈곤을 장기적이고 거시적 관점에서 해결하는 데는 힘에 부치는 규모가 많고, 그 속에서의 비효율도 분명 존재한다. 특히, 전문적이고 경험 많은 NGO 활동은 빈곤퇴치에 분명 기여하지만 외부 개입은 언제나 한계에 부닥친다. 각 개별국의 문화, 전통, 배경의 완벽한 이해로 이루어지기 힘들고, 사업디자인 자체에서 사업효과의 장기화와 자립화가 배제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제도적 차원에서 더 나은 원조 활동, 효과적인 개발협력을 위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모델이나 관점에 관한 담론과 실험도 지속되고 있고, 실제로 원조와 개발협력활동은 점점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며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우리 모두의  '인식'이다.  빈곤을 어떻게 인식하고, 불평등을 어떻게 해석하고,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과 실천이 빈곤 해소를 위한 본질적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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