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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un 20. 2023

내 얘기

 4년째 사찰 사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사보 원고는 한 달 앞당겨서 쓰니 6월에는 7월호에 들어갈 원고를 쓴다. 내가 정한 7월호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죽음이라고? 자고로 여름이란 만물이 가장 왕성하게 생명력을 뿜어내는 계절이 아닌가. 뼈까지 녹아내릴듯한 한여름의 열기를 온몸으로 흡수한 생명들이 질세라 더 열렬하고 강렬하게 자신의 목숨을 과시하는 여름에 죽음이라니! 하지만 절집의 상황은 다르다. 8월에 백중이 있기 때문이다. 백중은 음력 7월 15일로 이 날에는 돌아가신 분의 극락왕생을 위해 재를 올린다. 이때 7일마다 7번 재를 올리는 49재를 겸하는 경우도 많아 두 달에 걸쳐 백중을 지내는 사찰이 많다. 7~8월 사찰에 흰색의 영가등이 나부끼고, 주지스님의 법문이나 사보(또는 신문)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꼭 언급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감일에 맞춰 성실히 원고를 납품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영 찜찜했다. 글을 쓸 때도,  인쇄되어 나온 글을 읽을 때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진실을 또다시 마주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뭐냐고? 내 글에서 내가 보이지 않는다. 글을 쓴 내가 봐도 그런데 독자는 어떨까. 4년째 아무 표정 없는 가면을 쓰고 변죽만 신나게 울리고 있는 느낌이다. 논문이나 책을 찾아보는 등 열심히 자료 조사를 하고, 교리도 밑줄 착착 그어가며 공부하지만 원고를 보내고 나면  '아, 이건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쓸 수 있는 평범하고 고만고만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글 나부랭이'이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든다(그래서 원고 보낸 날은 그리 술이 땡기는 걸까나). 

 

 이번에 쓴 글의 주제는 앞서 말했듯이 죽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다. 한 다리 건너면(친구의 친구 또는 가족의 친구 같은 관계) 돌아가신 분이 있지만 가깝게 지내는 가족, 친지, 지인 중에는 세상을 떠난 이가 없다는 말이다. 

 

 불혹을 넘어서도 여전히 사람 사귀는 게 어렵고 힘들고 어색하고 서툰 사회성 부족과 그로 인한 좁은 인간관계, 관계가 주는 속박이 무서워 코로나 이전에 이미 습관화한 거리두기, 딱히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무심한 성격 때문에 아직 친밀한 이의 죽음을 마주하지 못한 행운을 누리고 있었을까. 죽음을 겪어 보지 못했기에 나에게 죽음은 추상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다. 죽음이 슬프다는 건 안다(그걸 모르면 사이코패스겠지...).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영상 속 인물이 울먹이기만 해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광광 울어버리는 쓸데없는 과잉 감수성의 인간이니 모를 리가 있나. 머리로 아는 죽음과 가슴으로 아는 죽음은 완전히 다를 텐데 내가 쓴 글에는 머리로 아는 관념적 죽음만이 담겨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알맹이가 쏙 빠진 글을 썼다는 생각에 며칠이 지나도 마음이 싱숭생숭. 내가 배정받은 3페이지(영화 포스터가 실린 것까지 포함하면 4페이지)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젠 제발 좀 개성도 맛도 없는 밋밋한 글에서 벗어나하는데 어찌해야 하리오.


 근래 원제스님의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는 책을 읽고 있다가 실마리를 발견했다. 두 번째 읽고 있는데 첫 번째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게 도대체 뭔 말인가 싶은 내용이 많지만(원제스님의 신간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아주 조금 더 이해가 되었지만 역시나 어렵다)  중간중간 머리를 탁 치는 부분이 있다. 이번에는 요 부분에서 눈길과 생각이 좀 길게 머물렀다. 


절집에서 큰스님들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건 경전에 나오는 말이고... 그거 말고 니 얘기를 해봐, 니 얘기."             
제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삶의 경험입니다.
되도록 직접 겪은 일을 쓰려합니다.
혹 누군가가 들려준 경험을 듣고 쓰기도 합니다.
개념이나 원리 해설은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끔 그런 글을 읽기도 하지만 보통은 보지 않습니다.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어서입니다.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 불광출판사





 맞다. 나는 내 얘기를 안 하고 있었다. 내 얘기라는 게 내 사생활을 밝히는 게 아님은 당연하고(사소설 쓰는 게 아니니까)  내 경험과 생각이 글에 드러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복기해 보면 글 군데군데 인용만 넘쳐났다. 경전을 인용하고, 유명한 스님의 법문을 인용하고, 교리책을 인용하고. 나는 남의 말 사이에 접속사와 형용사와 부사만 채워놓고 있었다. 즉, 접착제 역할만 하고 있었던 게다.

 

 내 글이 무미건조한 이유는 정보를 좋아하는 내 성향 때문일까 아니면 생각 없이 사는 게 편하고 좋은 태도 때문일까 아니면 구설수가 겁나(악플이나 신상털이 같은) 엄격한 자기 검열을 통과한 말들만 쏟아내는 자기 보호본능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글솜씨가 없는 걸 얼버무리는 고난도의 업무 능력이었을까.


 나란 중생은 생각을 해야 할 때면 알코올과 함께 야반도주를 하곤 했다. 맥주를 마시며 영화(또는 드라마)를 보면 사바세계는 사라지고 나만의 극락이 펼쳐졌다. 영화가 끝나고 술잔이 비워지면 사바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엉킨 생각과 엉망진창인 현실은 숙취와 함께 돌아온 탕자를 한심하게(and 한결같이) 맞아주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계속 이 패턴으로 살았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니 이런 삶도 복에 겨운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도 믿지 않지만 '전생에 쌓아놓은 복'이라는 게 정말 있었는지 별다른 문제없이 평탄한 삶을 보냈기에 술에 기댄 현실도피가 유지될 수 있었다. 불혹을 넘자 이제 남은 생의 길이&부피&무게가 얼마만큼이라는 게 산술적으로 와닿고, 그 시간들을 내 명의의 집은 물론이고 직업도 돈도 없는 상태로 살아가며 유병장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초조해졌다. 여기 더해서 아주 오랜만에 만난 선배 작가가 내 글에 대해 ' ~ 좋지만 이런 점이 부족하다'며 직구로 던진 비판에(칭찬과 비판의 비율은 2:8 정도여서 당근보다 채찍이 많았다)  현타가 왔다. 요점은 글에 공부한 흔적이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게으름이 묻어나는 글이라니! 쪽팔리다. 이에 결심덕후, 또 결심한다.


이제부터라도 생각 좀 하고 살겠다고. 그리하여 내 얘기를 좀 해보겠다고. 



 죽음에 관한 글도 내 경험, 아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이 아이를 잃을까 봐 덜컥 겁이 난다거나 아이를 잃은 부모가 나오는 뉴스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거나 아이 잃은 부모의 사적복수는 인정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풀었으면 예상가능해서 하품 쩍쩍 나오는 글 대신 좀 더 내밀하고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뒤늦게 후회를 한 모금 드링킹해본다.   



 내 얘기가 언제 내 안에서 술술 풀려나올지, 내 얘기가 한갓 쓸데없는 헛소리가 아닌 누군가에게는 2%라도 쓸모 있는 잡소리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날을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쓰고 또 써야겠다. 그리고 내 스타일도 찾아야지! 이쯤 다들 눈치챘겠지만 나는 부사, 형용사로 치장한 글을 좋아한다. 더해서 온갖 단어를 나열하는 것도 좋아하고. 글쓰기 작법 책과 전문가들이 제발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서 하고 있는데 최근 김혼비&박태하의 <전국축제자랑>을 읽다가 위안을 받았다. 그들 역시 '문장부호와 형용사, 부사 남발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음을 당당히 밝혔기 때문이다. 어라, 동지발견이네. 차이점이라면 그들의 글은 무진장 재미있고 신나고 생각이 빛난다는 정도랄까... 에라이...  동지라 하기에는 그 간극이 너무 크기에 남몰래 좌절한건 비밀이다. 


 정보와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인지라 앞으로의 글에도 온갖 팩트들이 나열되겠지만 그 사이 내 생각을 버무려 내 스타일로 펼쳐보겠다,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노트북 자판을 열심히 두들기고 백스페이스도 꾹꾹꾹 누르며 아침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가를 향해 렛츠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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