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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Mar 10. 2024

일일 금주 일지 4

금주 시도 50일째 - 대학원 등교 준비 덕분에 성공

2024년 3월 9일.


금주 50일째. 


한 달이 넘게 업데이트가 안되어서 역시나 술에 발목이 잡힌 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금주는 기적적으로 현재진행 중이며,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다.


그간 글을 안 쓴 이유는 뭐, 게을러서 그렇다.  


며칠 전, 곱창에 소맥을 말아먹고 불콰하게 취한 지인이 전화를 해서 


술 먹고 싶어 미칠 것 같지 않냐고, 금주가 힘들지 않냐고


평소보다 두 옥타브 높은 술톤으로 물었다.


21살 이후, 혈관에 알코올이 마를 날 없이 살아온 술꾼이었고, 


'내일부터 금주다!'를 수시로 내뱉는 상습적 술꾼이었기에

   

이번 백일 금주 역시 며칠 하다가 꼬라박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웬일로 성공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훗날 성공 비결을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아. 중간에 포기하면 쪽팔리잖아요.

 

동네방네 백일 금주 한다고 이야기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이전에도 동네방네 떠들어댔다가 포기하고, 누가 물어보면 마지못해서 실패를 인정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왜? 불혹을 넘어서 Fe가 좀 들어서?  아니면 술 한번 먹으면 이틀간 좀비가 되어 골골거려서?  


아니면  '코끼리 주스(필라이트)' 좀 그만 마시라는 딸아이의 핀잔을 더 이상 감당 할 수 없어서?


흠.. 그런 이유도 배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술에 끌려다녀는 내 모습이 꼴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참 오래도 끌려 다녔다. 참 즐거웠고, 참 징했고, 참 지랄 맞았지.


술 마시면 죽는다는 메디컬 닥터의 조언이 있기 전까지는 술을 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술에 휘어 잡힌 삶은 끝내야 하고, 바로 지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대학원이라는 새로운 시작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등록금이 얼만데! 공부해야지! 



확실한 건 이번에야 말로 나의 꺾이지 않는 의지를 만방에 알리겠다는 강철 의지 따윈 전~ 혀 없었다.


그냥 오늘도 안 마시고 , 다음날도 안 마시고 하다 보니 술 안 마시는 날이 곗돈 쌓이듯 모였고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술 생각이  나도 지금꺼정 금주한 날들이 아까워서 '기냥' 술을 안마시계 되었다.


참 쉽죠 잉~


게다가 간혹 '금주 현황'을 묻는 지인들에게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도 쪽팔리니까 더 잘 참았을 수 있었다. 이제 좀 덜 창피하게 살아야지.


그러니 뭔가 시작하려는 이라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라. 부러지기 쉬운 내 의지를 깁스처럼 단단히 붙들어 매주는 건 역시 체면이올시다.  


금주에도 관성의 법칙이 적용될 줄 뉴턴도 몰랐을 듯.


고로, 하다 보니 '금주가 제일 쉬웠어요'가 됐다 이 말씀입니다.




늦어진 업데이트에 대한 변명은 여기까지 하고,  아무도 관심 없을 듯한 근황을 써야겠다.


굳이 안 가도 됐을 OT에 참석하고(그래도 총학생회 카톡을 추가해서 꽤 쏠쏠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는 것과 손뜨개 코끼리 인형을 얻었으니 아예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무사히 수강신청을 마치고(대학원이라 그런지 수강신청 전쟁은 없었다)


유튜브로 화장법도 배워서 십여 년 만에 화장도 하고(근데 파운데이션을 잘못 샀다)


드디어 첫 수업에 출석했다.


이번 학기는 총 네 과목을 듣는다.  

 

학부 전공이 달라서 선수과목을 들어야 하는데 졸업 전까지 총 9학점(3과목)을 들어야 한다.


첫 해에 선수과목을 클리어하겠다는 원대하고 거창하고 까리한 계획이 있어서


이번 학기에 2과목을 신청했는데 그중 한 과목이 폐강 위기에 직면했다.


교수님께서 폐강 안 되도록 하겠다고 단호하고 믿음직한 얼굴로 말씀하셨으니 미천하고 비루한 대학원생은 그저 기다릴 뿐.


만약 폐강되면 가련한 대학원생은 다음 학기에 피똥을 싸리라.


선수과목은 학부 수업이다.  파릇한 대학생들 사이에 노릇한 아줌마는 잡초처럼 끼어 앉아 수업을 들었다. 그것도 제일 앞자리에서. 그래도 대낮이라 칠판이 잘 보여서 안경을 끼지는 않았다.

 

대학원 수업에서도 노릇함의 굴욕을 맛보아야 하나 했는데 웬걸, 나는 젊은이 축에 속해 있었다.  나이 어린 걸로는 탑 40%나 그 언저리임이 확실하다. 

 

스님들은 대개 젊으시고, 재가자들은 사회생활을 하다 와서 나이가 좀(아니면 많이) 있거나 아니며 대학 졸업하고 바로 와서 아주 젊었다. 그리고... 청바지 입은 분들은 거의 없었다. 첫 주라서 그런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점심시간에는 구내식당에서 혼자 먹었다. 


혼밥이란 말이 유행하기 전부터 이미 혼자 밥 먹고 영화 보고 쇼핑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던 나홀로 얼리어답터였기에 


외롭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식권 발급받는데 20분, 밥 나오는데 30분이 걸리는 대참사를 겪고 나서(먹는데 십분 걸렸나...)


시간도 아끼고 돈도 아끼는 일타이피의 해결책으로 도시락을 싸 다니기로 했다. 


토요일에 쿠팡에서 도시락과 샐러드용 채소, 방울토마토를 주문했다.


반찬 만들고 메뉴 고민하기 귀찮아서 간단히 샐러드와 야채를 먹으려고 했는데 


일요일 저녁, 브로콜리 데치고 단호박 찌고 온갖 설거지에 시달리는 로동을 하다 보니 


구내식당이 베리마치 그리워졌다.


참아야 한다. 허나 도시락이 지겹거나 미워지면 수육국밥 먹으러 구내식당에 출몰할 수도 있다. 

 


이번주는 첫 주라 대부분의 수업이 일찍 끝났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도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지만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는 다음 주부터는 점심엔 샐러드란 이름의 풀때기를 뜯고, 


남는 시간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이유는 대학원 연구실을 신청했지만 똑 떨어졌기 때문이다. 쳇.


내일은 사물함 신청할 수 있냐고 학과사무실에 가봐야지... 아. 내게도 집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파릇노릇한 아줌마는 이제 등에는 백팩을 메고, 손에는 도시락을 들고(3단 도시락이라 부피가 있어서 백팩에 안 들어가더이다)


학교로 가야 하기에 술 마실 시간이 없다.



대학원 등교 준비하느라 술을 못 마셔서 금주 50일 차 성공. 참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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