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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ril Sep 02. 2020

수습 승무원에게 주어진 극단적 스케줄

Probation 기간 중 첫 로스터

매월 말, 다음 달 비행근무표 스케줄을 받는다.

1년에 한 달은 스탠바이달로, 한 달 내내 스탠바이를 받기도 한다. 또, 그룹을 나눠 그룹별로 원하는 취항지를 신청하고 순위에 따라 스케줄을 받을 수 있다. 1순위여도 신청한 나라를 못 받는 경우가 많다. 매일 비행 편이 있는 도시가 아니거나, 해당 국가가 홈타운인 크루들이 많거나, 아주 인기 있는 도시일 경우 등이다. 인생에 한 번쯤 가봐야 한다는 브라질 리오, 환상의 휴양지 모리셔스, 말이 필요 없는 뉴욕을 제치고 나에겐 당시 남자 친구가 큰 버팀목이었기 때문에 나의 1순위는 항상 한국이었다. 비행 편마다 각 국의 해당 나라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Language speaker가 반드시 1명 이상 탑승해야 하지만, 또 너무 많으면 안 되는 규정이 있다. 크루 약 서른 명 타는 비행기에 이코노미, 비즈니스, 일등석을 합쳐 Maximum 9명이었던 것 같다. 한국 비행은 항상 9명이었다. 그 때 당시, 2만명의 크루 중 약 900명이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이런 나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에미레이트에 있는 동안 한국 비행은 3번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도 마지막 한국 비행에서는 엄마, 아빠와 같이 그랜드 하얏트에서 근사한 식사도 함께 하면서 '이런 게 효도지~' 하는 생각을 들게 했었다.


2개월 간의 지옥훈련 뒤 설레는 마음으로 받은 나의 첫 비행 스케줄. 당시엔 힘든 줄 몰랐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고.. 지금 보니 참 신입에게 가혹하다.


XX가 쉬는 날이고, XXR은 쉬지만 쉬는 게 아닌 쉬는 날이다. SQ21는 21시부터 스탠바이, Rest는 스케줄이 새벽에 끝난 경우 쉬는 날이다. 듀티의 종류도 많지만 쉬는 날 종류도 참 많다. 90% 할인 티켓을 가진 승무원들은 쉬는 날 두바이 시내에 돌아다녀도 '집콕'과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길게 쉬는 날 다른 나라를 가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할 것이다. 하지만 'Off base(두바이를 떠나서 쉬어도 되는 날)'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쉬는 날이 진짜 쉬는 XX가 중요하다. 숫자는 각종 비행 편 번호다. 맨 첫 6 또는 7은 비행기종을 말한다. 6 은 A380, 7 은 Boeing777 이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A380 은 500명 가까운 승객을 태울 수 있는 2층 비행기이다. 그만큼 크루들도 많이 필요하다. (1층인 이코노미에만 대략 10명이었던걸로 기억한다.)


Head Quarter - 출근길


첫 비행은 방글라데시 다카 턴어라운드(취항지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고 재정비 후 두바이로 돌아오는) 비행이었다. 거의 하루가 꼬박 걸리는 비행이다. 승객들이 까다롭진 않지만 음식/바 카트를 가지고 나가면 탈탈 털려 빈수레로 돌아온다. 끝날 줄 모르는 7up 털이. 그냥 아무거나 손에 쥐어주면 되는데.. 서비스교육의 정석대로 마치고 온 나는 비즈니스클래스까지 찾아가 세븐업을 털어왔다. 열정의 신입사원! 비행 내내 모든 음식과 음료를 던지다시피 서비스를 했고, 4시간이 4분처럼 지나갔다.


화장실 문 닫는 법을 몰라 활-짝 열려있는 문 안으로 바지 내린 승객이 나를 보며 웃어도 당황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태풍이 휘몰아치듯 정신없는 반나절 비행을 첫 비행으로 하고 나니, 세계 여행이고 뭐고 냅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졌다. 그렇게 '취항지'에 맞는 진정한 실전 서비스를 배운 날이었다. 방글라데시 비행에 필요한건 그야말로 스피드와 술 한잔 했다치고 무시해야하는 멘탈.



끔찍함을 겪고 다음 비행을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두 번째 비행 브리핑실로 향했다. 새벽비행이라 잠을 한숨도 못 자고 공포에 떨며 집을 나섰다. 잔뜩 긴장한 나를 보며 사무장은,

"We are heading to Zurich. Relax!"

릴랙스는 개나줘. 난 어제 방글라데시 턴을하고 왔어.


그치만 겁먹었던 것과 달리 스위스 승객들은 너무나 친절하고 평화로웠다. 방글라데시 비행에서 꺼질 일 없던 콜벨은 울리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Flight deck (조종실) 에서 별구경도 하고, 퍼스트클래스의 호화로운 침실도 구경하고, 크루들과 폭풍 수다를 떨며 호텔에 도착했다. 피곤한 몸은 침대로 다이빙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첫 비행인 SUPY(수습 승무원, 환영과 동시에 놀림의 대상인 그 날 비행의 주인공)을 크루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짧은 치마로 갈아입고 밤 10시의 스위스를 즐기러 나갔다.


24시간이 넘도록 깨어있어 맥주 한 잔에 헤롱 거렸는데, 크루들은 집에 가겠다는 나를 끌고 기어이 클럽으로 향했다. 클럽에 들어서자마자.. 앞이 노래졌다. 기절했다. 기억이 없다. 눈떠보니 같이 온 부기장의 등에 업혀있었다.


"미안 나 무겁지.."

"무겁진 않은데 네가 기절해서 다리를 하늘 높이 올리느라 네 팬티 봤어, 미안해"

..?

차라리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돌아오는 비행에서 크루들은 나를 볼 때마다 괜찮냐고 물었다. 쪽팔린 게 괜찮지 않으니 제발 모른 척 지나가 달라며 두 번째 비행을 마무리했다. 어째 첫 비행보다 힘들게 느껴졌다. 역시 크루의 자질 1순위는 멘탈력인가보다. 2년 뒤 그 때 함께 클럽에 갔던 브라질 크루를 비행에서 만났다. 에미레이트는 매번 함께 일하는 크루가 바뀌기 때문에 2만 명의 크루들 중 또다시 비행에서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고, 기억력 안 좋은 내가 그 크루를 기억할리 없었다. 한창 일하는 중에 내려와 나보고 수습 비행 때 스위스에 가지 않았냐고 한다. 아주 느낌이 좋지 않아 아니라고 했지만 기어코 기억해서 서비스마다 내려와 나를 놀려먹었다. 스위스 클럽에서 팬티보여준 애가 바로 얘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작정이었나보다. 스위스 비행 갈 때 마다 크루들한테 "내 비행에서 SUPY 가 말야~"하면서 썰풀고 다녔겠지.


나의 첫 스위스 비행을 함께했던 크루들


그렇게 10월은 악명 높은 턴 비행 8개 (다만, 쿠웨이트, 첸나이, 콜롬보, 도하, 봄베이..) 그리고 스위스와 모리셔스를 두 번씩 다녀왔다. 지옥을 먼저 보여주고 모리셔스 같은 천국을 골고루 섞어주며 극단적인 스케줄을 제공해준 에미레이트 로스터팀.


모리셔스는 지상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따뜻하고 평화로운 휴양지이다. 최근 일본 선박이 산호에 부딪히며 엄청난 양의 석유를 유출시켜 회생불가 위기에 놓였다는 안타까운 뉴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참 안타깝다. 모리셔스 사람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졌다. 서두름이 없고,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어주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는데, 리셉션 아저씨가 독일어로 Excuse me 가 뭔지 아냐고 물었다. 승무원들은 전 세계 언어를 조금이라도 접할 수 있는 게 참 좋은 것 같다고 말해주며 해피바이러스를 왕창 전파해주셨었다. 크루들이 지내던 Shandrani Resort 가 최고의 호텔이라고 말하니, 전 세계를 다니는 너희들이 최고라고 말해주는데 더할 나위가 있겠냐며 자부심을 드러내던 아저씨에게서 내 일과,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엔 승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예쁘고, 잘생기고, 모델 같은 사람을 뽑는다는 국내 항공사의 승무원 '이미지' 때문이다. 승무원은 다양한 업무를 가지며 그중 최우선 업무는 안전이다. 기장이 안전한 비행운전을 책임진다면, 승무원은 승객들의 위급상황 등에 대한 안전을 책임지기 때문이다. 국내 항공사도 다르지 않다. 대학생 때 영어 과외를 하던 아가들이 커서 진로상담을 하곤 했다. 제일 먼저 왜 승무원이 하고 싶냐고 물어보고, 멋있고 예쁘다고 말하면 승무원은 결국 생계를 위한 수단이자 직업이지 꿈이 아니라고 말해줬다. 즐겁고 좋아 보이는 어떤 일이라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존재한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즐기며 할 것인가는 나의 몫이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합적인 일을 하다 보니, 일 자체가 즐거울 수만은 없다. 길고 고됐던 비행 뒤에 수고했다는 승객의 한마디, 항공사를 대표한다는 자부심, 안전하게 비행을 마쳤다는 작은 성취가 짧지만 행복했던 크루 생활을 만들어주었다.


5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10년 전처럼 기억이 흐려진다. 시간이 왜 이리 빠른지.. 시간 가는 속도가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이 딱인 것 같다. 지금은 사무실에 앉아 주로 컴퓨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직장인이지만, 내 일을 얼마나 즐기며 성취를 얻을 것인가는 그때나 현재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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