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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뭉치 Mar 10. 2024

우리가 돌보는 법

우리 고양이 소피가 이빨을 뽑았다. 평소에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큰 걱정 없이 건강검진에 갔던 차였다. 고양이들을 병원에 맡기고 근처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들어본 적도 없는 치아흡수병변이라는 질병이 발견됐다고 했다. 고양이들한테는 흔한 질병이라는데, 치료할 방법이 없어 발견되면 뽑는 것 밖에는 별 수가 없다고 했다. 고양이들이 마취에서 깨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곧장 병원으로 갔다. 엑스레이 화면을 띄워놓고 문제가 있던 이빨을 설명해 주는 수의사 선생님 앞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4.3kg 밖에 안 하는 이 작고 작은 쪼꼬미한테 뺄 이빨이 어딨다고. 좀 주책맞아 보일 것 같아 나오려던 눈물을 냉큼 집어넣었다.


고양이들과 집에 돌아와 밥을 챙겨주고는 그대로 뻗었다. 동물병원은 엑스와 이혼하기 전부터 다니던 곳이라 지금 사는 곳과는 많이 멀다. 유아차에 고양이 둘을 태우고, 전철을 한 번 갈아타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그 역에 내려, 또 10분을 걸어야 하는 병원에 다녀오는 건 나한테도 큰 일이다. 게다가 소피가 이빨을 뽑아야 한다고 한 순간부터 하루 종일 마음을 졸였다. 눈을 떠보니 고양이들이 내 곁에서 늘어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취에서 깨어나 풀 죽은 고양이들이 안쓰럽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고양이들이 보인다. 밤새 내 곁에서 한자리 씩 차지한 채 대자로 뻗어 잠을 자는 고양이들 덕분에 매일 요상한 자세로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고양이들은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밍기적거리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슬슬 집사가 일어나서 밥을 줘야 하는 시간이다. 고양이들에게는 시간을 재는 능력이 있다는데, 난 그 설을 100퍼센트 신뢰한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화장실로 직행한다. 고양이들은 언제나 변기에 앉아있는 날 에워싸고 밥 달라며 시위를 한다.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와, 서랍에서 습식사료를 꺼내 식기에 담아 고양이들 앞으로 대령할 때까지 불호령은 멈추지 않는다.


허겁지겁 밥을 먹는 고양이들을 가만히 본다. 그럴 때면 나는 좀 무서운 마음이 들곤 한다. 내 세계는 너무너무 넓어서 가야 할 곳도, 만나야 할 사람도, 해야 할 일도 너무너무 많은데, 이 둘 고양이의 세계는 열 평 남짓, 원룸 오피스텔이 전부다. 내가 꾸린 이 작은 공간이 고양이들이 한 생 동안 누리는 세상의 전부라는 게 나는 가끔 무섭다.


탈혼을 결정하고 집에서 나오던 날, 나는 소피랑 무섬이를 양팔에 하나씩 안고 말했다. “이제부터 엄마랑 셋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 잘할 수 있지?” 셋이서 살 집을 구하고, 직장을 옮기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꾸려나가며 가끔 집채만 한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나는 다시 소피랑 무섬이를 양 팔에 하나씩 안았다. 그리고는 전신 거울 앞에 앉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희는 이제 나랑 셋이서 건강하고 행복해야 해. 이제 어쩔 수 없어.” “잘할 수 있어~요? 없어~요?” 답은 정해져 있었다. 고양이들은 나와 건강하고 행복해야만 했다. 그건 고양이를 위한 말이라기보다, 나를 위한 주문이었다. 막막한 내일을 맞이하려면 중얼중얼 주문처럼 외울 말이 필요했다.


이제는 그런 주문이 달리 필요하지 않다. 삶에 안정이 다시 찾아오자, 싫다고 발버둥 치는 고양이들을 양팔에 억지로 안을 일은 별로 없다. 이제서야 고양이들한테 진심으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가 만든 이 세계에서 너희는 건강하고 행복하니? 하루만 고양이가 되어서 무섬이와 소피의 하루를 똑같이 살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툭하면 아팠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이 파업에 들어간 것인지, 몸이 제 기능을 하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생리가 멈추고, 몸이 붓고, 툭하면 감기와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망가진 몸으로 일터에 가서 안간힘을 쓰며 버티다가 집에 돌아오면 옷도 벗지 못한 채 거실 바닥에 쓰러져 두세 시간을 기절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고양이들에게 간식을 챙겨주고, 맥없이 장난감을 흔들었다. 고양이들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아프기라도 한다면, 고양이 돌봄에 쓸 에너지와 비용이 훨씬 더 들어갈 테니, 일상적 돌봄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파서 고꾸라져 있으면 고양이들이 꼭 어딘가 한두 군데씩 아프단 거였다.


내가 이틀 동안 옴팡 체해서 빌빌거릴 때는 무섬이가 아직 다 식지 않은 인덕션에 올라갔다가 놀라 날뛰었고, 그러다가 앞발톱이 통째로 빠져버렸다. 작년 6월엔 컨디션이 바닥인데 해외출장이 잡혔다. 물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움직여 짐을 싸고 있는데, 무섬이가 어디서 긁혔는지 등때기 피부가 너덜너덜한 채 나타나서 급히 병원으로 들고뛰어야 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꽤 길게 몸살을 앓았다. 이번에는 소피 턱에 난생처음 보는 왕뾰루지가 올라와 며칠 고생을 했다. 내가 기운도 없고 정신도 없을 때 꼭 고양이가 아프다며 징징거리는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너도 그랬어. 넌 내가 아프면 꼭 아프더라. 엄마가 일하러 집 비우면 꼭 하필 그때 아파.” 그때 엄마는 누구한테 징징거렸을까.


고양이들과 셋이서 가족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은 모험이었다. 지역을 옮겨가며 집을 네 번 옮기고, 직장도 두 번을 옮겼다.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바깥에서 안간힘을 쓰는 동안은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내가 바깥에서 버티는 동안 고양이들도 크게 고생을 했겠지. 한 명의 양육자와 이별하고, 쌩판 낯선 공간에 부려져 집사가 없는 긴 시간을 둘이서 버텨야 했으니까. 한참 집을 비웠던 집사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한참을 기절해 있거나 소리 내어 울거나, 고양이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행동을 반복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아프면, 고양이들이 아픈 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너희랑 나는 이제 운명공동체야.”라고, 주문을 외듯 고양이들에게 말해왔다.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을 겪는 고양이들에게 미안해서, 어떻게든 고양이들과 잘 살아가고 싶어서, 중얼중얼 변명 같은 주문을 외웠다. 내가 아프면 따라 아픈 고양이들을 보면 그 말이 영 터무니없는 주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느 날 우연히 가족이 되었지만, 운명이라는 끈은 우연인 것치고는 두텁고도 단단하게 우리를 엮었다. 고양이들에게 “내가 만든 세상에서 행복하니?”라고 물을 때, 내가 받고 싶은 대답에 가까워지려면, 내가 행복해지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함을 어렴풋이 알아간다. 나의 행복과 건강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돌보는 힘이 되리라고, 고양이들을 보며 생각한다.


소피의 뽑았던 이빨 자리가 일주일 새에 새 살로 차올랐다. 새 살을 돋구는 시간은 고양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유효하게 흐른다. 고맙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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